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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평사운동 당시 인권평등 상징 저울(衡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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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형평사운동醴泉衡平社運動의 이해理解(1)
조윤
Ⅰ. 예천의 형평사운동
1. 개관
예천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을 위해 1923년 8월 9일 <조선형평사 예천분사>를 결성했다. 이는 같은 해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처음 일어난 백정해방운동보다 석달 보름 뒤의 일이다. 예천의 형평분사는 그 사원 수(백정 인구)가 인근 안동이나 영주보다 월등히 많은 891명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수치다. 이처럼 지역에 거주하는 백정이 많고 이들의 결속력도 타지역에 비해 강하여서 장래 이 운동의 중심체로 기대를 모았다. 이리하여 형평분사 창립 제2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키로 하고 일의 추진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25년 8월 9일 2주년 기념식장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예천지역의 농민 단체와 일반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인, 반형평운동 단체인 농민회원 300여 명이 식장을 습격하였다. 이로써 지역의 분란이 되었고 형평운동 단체가 들고 일어나는 전국적인 이슈가 된 것이다.
주로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인 소위 백정이 예천군내에 그 수가 경북도내에서도 월등히 많았다. 이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예천·용궁지역이 한우의 집산지일뿐더러 농산물 등 물류 유통의 거점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900명에 가까운 회원과 그 가족 그리고 신분차별운동에 동조하는 사회주의 노동단체 등이 세력화하여 한 동안 신문지상을 통한 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예천시장 농산물 거래액이 대구를 제외하고, 김천, 안동, 상주 다음으로 많은 4위였다. 이로 미루어 우시장의 거래와 도축업도 활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백정의 수와도 연결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 1918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1928.12.1. 경북선 점촌-예천구간이 개통되면서 경북북부지방의 교통 요충지로 예천은 '제2의 개성'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였다.
영주-예천, 안동-예천, 점촌-예천의 철도 소통으로 자연적으로 각종 물류의 집산지가 되었고 농경에 필수적 역할을 하던 농우의 거래지인 예천-용궁 우시장이 북부지방에서 가장 활발하게 거래 되었다. 본고에서는 예천형평분사 사건의 전말을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향토사 자료 등을 이용하여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활동
1923년 8월 9일 창립 당시의 상황에서부터 1925년 8월 9일, 2년 정도의 예천형평분사 활동 기록은 알 수 없다. 아마 창립을 한 상태에서 주변 여건이 이들 활동을 제약한 분위기에 눌러, 세찬 인권운동이나 신분 평등 운동은 하지 않은듯하다. 다만 창립하던 해 10월말 당시 경남 진주본사 장지필과 경북지사장 김경삼이 예천을 방문하여 임시회의에서 사원의 신분을 상징하던 머리를 집단적으로 자르기로 결의하였으며, 활동기금으로 1천 원을 적립할 것을 계획하고, 굴욕스러운 사회관습을 철폐하자고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예천지방에 매년 7월 백중에는 농부들이 놀이를 개최하였다. 이때 농악놀이를 하며 춤추던 농부들은 백정 부녀자 한 사람을 볼모로 잡아다 놓고 그를 풀어주는 대가로 고기나 소머리를 요구하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백정가족이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모를 집단으로 폭행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악습철폐를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강구되고 있었다.<장달수 반형평운동의 성격 예천사건에서 인용>
1925년 7월 5일 예천형평분사 사무실에서 제2회 임원회의를 열었다. 이날 예천신흥청년회 회원들이 다수 입사하였다. 1925년 7월 신흥청년회 회원들이 형평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단체로 예천분사에 가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예천형평분사가 창립 후 별 활동이 없어 이를 촉진하기 위하여 가입 지원하였다. 이들은 동년 5월에 열린 간부회의에서, 11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8월 9일 창립 2주년 기념축하식을 성대하게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당시 조선, 동아일보 기사 인용>
이들은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 창립 제2주년 축하식을 예천읍 서본리 매립지에서 가졌는데 이날 기념식 중 축사에서 김석희(金碩熙)가 백정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로 인해 백정 김원준이 사망하였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였으며 예천청년회, 농민 등 가해자 12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사회분위기로 백정신분해방운동은 시기상조로 신간회 등 일부 사회주의 단체의 지원이 있었으나 일본 관헌의 방해와 압박 그리고 일반인들의 반발에 부딪히기는 하였으나 예천형평사사건은 전국적 백정해방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Ⅱ. 예천 형평사 사건 醴泉衡平社事件
1. 예천형평분사 습격사건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 창립 제2주년 축하식이 신흥청년회 지원 등에 힘입어 성대하게 열렸다. 개최장소는 예천읍 서본리 매립지(현 구시장 추정)였고, 식장에는 형평분사 회원 891명을 비롯해 전국의 형평사 간부들이 참석하였다. 지역의 일부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예천분사 회원들은 형평운동을 위해 기념식이 시작되기 전 자동차로 선전지 1천매를 읍내 시가지에 뿌리고, 형평사분사앞 광장에 녹문(綠門)을 세우고 만국기를 다는 등 당시의 행사 장식으로는 거창하였다. 기념식을 위해 형평중앙총본부 상임위원 장지필(張志弼), 위원 이이소(李而笑)와 사회운동단체대표 안동화성회 집행위원 김남수(金南洙), 풍산소작인회 최영수(崔榮洙) 그리고 예천청년회 회장 김석희(金碩熙), 예천 오오회 회장 장동호(張東護), 정수열(鄭秀烈) 등의 축사가 있었다. 축사와 각지에서 온 축전이 있었고, 축사를 한 인사들은 대략 백정들이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한 각종 일반인들의 사회적 시선과 제도적 정비가 조속 조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예천청년회장 김석희는 연설에서 “백정을 압박한 것은 당시의 법이 그러하였기 때문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 등을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니 여러분은 그 표면 여하보다는 모름지기 그 실질적 향상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어 “조선왕조 오백 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마는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일부 형평사원들이 감정을 내뱉고, 형평사원의 질문과 공박이 있었으며 장내는 긴장감이 팽배해지자, 김석희는 형평운동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연설명을 하기도 하였다. 형평사 관계자 김도천(金道天), 박학선(朴學先)이 축사에 대한 불평과 노일전쟁의 역사를 역설하다가 박학선은 경관의 중지 요구에 이유를 따지다가 결국 구속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천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형평분사가 설치된 후 사원들의 태도가 불공할 뿐 아니라 신흥청년회 사람들이 입사하여 그들의 기세를 돋아주는 것은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형평분사와 신흥청년회를 박멸시키자”라고 하며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형평사원들의 폭언을 전해 들은 일반인들은 형평사원에 대한 습격을 감행하게 되었고, 축하식장의 장식과 중화요리점에서 술잔치를 벌인 일 등이 알려지자 일부 읍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식장 밖에 모여 축하행사를 구경하고 있던 일반인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백정을 압박할 목적으로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후 8시경이 되자 모인 군중이 약 300∼5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식장을 포위하여 소리 지르며 백정들의 불손한 행동을 질책하였다. 군중들은 축하연에서 한 결의를 철회할 것을 주창하면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응징할 것이라 외치면서 식장 안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이에 형평사 측은 분노한 기세로 보아 교섭이 불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상호 대표자를 선정하여 옥내에서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군중 측 대표 45명을 식장안으로 들여 보내자 장내의 형평사원들이 일반인 대표를 포위하고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격한 옥외의 군중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몰려들어 난투가 벌어졌다. 축하식장에 설치하였던 솔문 등 여러 가지 기구를 파괴하는 동시에 사원들과 직접 충돌이 되어 그 형세가 자못 위험하였고 부상자도 2사람이 발생하였다. 결국 경찰이 진압하여 10시경 해산되었다. 경찰은 농민 1명을 검속하고 그 이튿날까지 형평사 부근을 엄중히 경계하며 선동자를 조사하였다.
이에 형평분사에서는 금반 사건에 대하여 다수의 참가자가 농민이므로 모든 책임이 농민회에 있다고 인정하고 형평분사에서는 즉시 노동회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一, 본 형평사에 대하여 사과장을 제출할 것 二, 신문지를 통하여 광고로써 일반민중에게 사과할 것 三, 중요 간부를 인책 처분할 것 “이를 8월 10일부터 5일 이내에 실행하되 불연이면 본사에서는 적극적인 수단을 취함” 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환난의 대항책을 강구할 목적으로 긴급총회를 개최하겠다는 뜻으로 경찰당국에 신청을 하였으나 당국은 결의 사항이 너무 과격하여 도리어 농민의 반감을 산다는 이유로 금지 명령을 내렸다.
8월 10일 밤에도 화난 일반인이 형평사분사를 포위하고 일부는 옥내에 들어가 난타를 자행하였다. 농민들의 재차 습격을 예상한 형평사원들은 모두 몽둥이와 칼 등을 준비하여 가지고 있다가 농민과 충돌이 되었는데, 현장에는 완연한 전쟁을 이루어 부상자가 4-5인이 되었고 미리부터 그 부근을 경계하던 경관대는 즉시 군중을 해산시키고 4-5인을 검속하여 목하 사실을 조사하는 중인데, 이 사건을 매우 확대될 모양이었다. 남은 군중은 몇 달이던지 계속적 행동을 취하여 형평사가 없어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싸워 보겠다고 하여 그 형세가 매우 험악 하였다. <동아일보 1925.8.15.>
수백 명의 머슴·막일꾼들이 형평사 지회를 습격하고 길 가던 백정들을 구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을과 을’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분철폐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형평사 지도부는 다른 사회 단체들과 손잡고 연대 활동을 펴나가게 되었다.
8월11일 저녁, 군중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장지필, 이이소, 김남수를 잡으려고 하여 예천경찰서에서 그들을 소환하여 조정을 할려고 서장이 나서서 이들은 속히 예천을 떠나라고 종용했다. 또 예천 안에는 형평분사를 두지 말라는 말을 하며, 말하기 전에 무수한 힐난을 하였다고 한다. 경찰서 밖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삼대 서 듯하여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므로, 우리가 갈 수 없으니 군중을 해산시키든지 경관으로 보호를 하여 주든지 해 달라고 서장에게 세사람이 요구하였다. 서장은 순사 1명을 보호하라며 따라 붙여 주었는데, 형평분사 근처에 가서는 순사가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3인은 하는 수 없이 따라오는 군중들 때문에 분사 사무실로 들어 갔다. 이날 밤 9시 반경, 수 천 명의 군중이 분사를 대거 습격하여 곤봉을 휘두르며 가택 수색을 하고 닥치는 대로 구타하여 형평사중앙총본부 집행위원 장지필, 이이소, 예천분사장 박원옥(朴元玉), 부사장 등이 부상을 당했다. 그 외 구타당한 자가 무수히 많았다. 가해 폭행자는 모두 29명으로 이들은 30세 이후의 일반인들이다.
… 슬프다 제군들! 형평사원과 농민 간에 차별이 있으면 몇 만분의 일이 있으며 조선인이라고 하는 공동의 비참한 운명을 지닌 마당에 무엇이 어느 만큼 다른 것일까? 하물며 서로 협력하고 해방운동의 기세를 일으켜 「생生」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에 여력이 없는 이 때에 이 싸움은 참을 수 없는 분노만을 일으킨다. 더구나 형평사가 백정의 모임이라고 하여 종래의 계급적 인습적 감정에 지배되어 이러한 분규를 일으킨 것이 사실이라면 그 무지를 책함과 동시에 반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 서로 반성하고 부정한 싸움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한다.<500여농민 형평사를 습격, 조선일보 1925.8.>
8월 12일, 부상자들은 안동병원에 입원하였다. 장지필은 석원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받은 결과 생명에는 관계없이 되었으나 두부, 요부, 견부 등은 몹시 부당을 입었다. 코와 입에서 피가 날 뿐만 아니라 임의로 몸을 작동하지 못하였다. 이이소를 결박하여 기둥에 매어 단 후 몹시 난타하여 지금부터는 이전과 같이 백정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은 후, 일반군중들은 형평사원 집들을 수색하여 남녀를 물론하고 발견하는 대로 잡아내어 구타하였다. 한편 신흥청년회를 습격하여 “신백정을 잡아 죽이겠다”고 외치면서 수천명의 군중이 극도롤 흥분되어 일반형평사원들의 생명이 위급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몸을 피하여 산과 들에서 밤을 새웠다. 경찰서에서는 관내 각 주재소 순사까지 비상소집하여 즉시 혐의자 23명을 검속하고 엄중한 취조를 하였다.
12일 오후 5시경 형평분사원 전원을 경찰서로 소환하고 신입사원에게는 퇴사하기를 요구하고, 재래 사원들에게는 급격한 운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요구를 하였다. 형평사원들은 이에 슬픔에 싸였는데, 밤 8시경 청년급 농민 수백 명을 군청 앞 신도로에 모아 놓고 지금부터 불온한 행동을 취하면 소요죄를 적용하여 무기를 사용하여 진압하겠다고 엄중한 경고를 하였다.
8월 12일 예천청년회에서 오후 5시, 불교 포교당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임시 의장 이대일 사회 하에 농민 대 형평사 문제를 연3일 출동되어 예천시민이 안심치 못할뿐 아니라 청년회 자체가 수수방관 할 수 없다고 소요조정책을 토의 한 후 조정위원 14명을 선임하였다.<동아일보 1925.8.26.>
다음편에는 형평운동의 전국적 확대를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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