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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당 장석영 선생 영정 |
| 회당 장석영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6월 10일 14시 칠곡군민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회당 장석영 선생은 조선 말엽의 유학자로 평생을 학문 연구와 그 실천에 힘쓰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입니다.
회당 선생은 인동장씨 남산파로, 여헌 장현광 선생의 9대손이며, 1851년 10월 24일 인동 각산리(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녹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북청부사 등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고 형조참판에 오른 장시표 공이고, 모친 또한 조선 중기 대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의 후손인 청주 정씨입니다.
여현 장현광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이자 산림으로 이름 높은 유학자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집대성하여 기록한 수양서 <우주요괄첩>, <여현집>, <성리설>, <역학도설>, <용사일기> 등을 남긴 우주와 주역, 유학 등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추구했던 대학자입니다.
한강 정구 선생도 외증조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가학을 잇고,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한 새로운 학통으로 실학의 연원을 확립한, 특히 예학에 밝았던 대학자입니다.
회당이 태어날 당시 조선 사회는 오랜 세도정치와 붕당정치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지배층의 부정부패로 삼정이 문란해져 농민들의 삶이 피폐하고 농촌사회가 급속도로 붕괴되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1862년 진주에서 봉기한 농민항쟁은 삼남지방 70여 개 군현으로 순식간에 번져갔고, 1년여 만에 수습되지만 조정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농민항쟁은 더욱 격화되고 외세의 문호개방 압력까지 더해져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회당은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접하면서 일신의 영락을 위한 벼슬이 아닌, 성인을 스승 삼아 덕행을 닦고 이치를 깨우쳐 난세를 극복하고 세상을 안정시킬 덕치를 세우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습니다.
19세기 중·후반 조선의 유학자들은 사회 문제를 타계하기 위해 선유들의 철학적 논의를 돌아보며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고, 그 중 한 분이 한주 이진상입니다.
한주 선생은 숙부 응와 이원조의 가르침을 받아 주자학에 입문합니다. 응와 선생은 상주의 입재 정종로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입재는 퇴계의 학맥을 이은 서애 류성룡의 고제 우복 정경세의 후손으로, 대산 이상정 문하에 나아가 퇴계에서 학봉 김성일로 이어진 학맥을 계승한 분입니다. 한주 선생은 사회문제를 타계하기 위해 ‘심즉리설’과 ‘직’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구체적인 사회개혁방안을 담은 경세서 <묘충록>과 <사례집요>, <춘추집전> 등을 저술합니다.
한주 선생은 1867년 회연서원에서 성주 인근의 유림을 모아 경서 강회를 시작하면서 당대 현실에 대한 실천적 문제의식과 학문적 성과에 근거한 유풍 쇄신운동을 이끕니다.
1870년 성주 천창천(현 가천면 창천리)으로 이주한 20대의 회당도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갖고 과거를 준비하면서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1878년 봄, 회연서원에서 열린 <근사록> 강회와 향음례에 참석합니다. 그 강회에서 회당은 군중 속에서 초연하게 강회와 향음례를 주관하는 한주의 엄정한 인품에 감화되어 그해 5월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그 문하에 입문합니다.
한주 문하에서 주자학의 핵심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던 회당은 1880년 부친이 북청부사로 도임하자 부친을 따라 갑니다. 부친이 부사로 재임하면서 그 지역 사족과 백성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장려하면서 문풍을 쇄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대부로서 포부를 펼치기 위해 과거 준비에 전념합니다.
그러나 2년의 소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부친이 무고를 당해 자산으로 유배되자 회당은 관료 사회의 부패와 시기, 질투, 음해를 목격하고 관료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깊은 회의를 느낍니다.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83년 겨울, 상주에서 응시한 과거장에서 시관에게 뇌물을 주어 벼슬을 청탁하는 부정이 자행되는 현장을 목격한 회당은 벼슬을 단념하고 스승 한주 선생을 모범삼아 처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회당은 한주 선생의 문하에서 9년간 가르침을 받으며 주자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주문팔현’으로 일컬어집니다. 주문팔현은 한주 선생의 아드님인 대계 이승희를 비롯해 후산 허유, 면우 곽종석, 자동 이정모, 홍와 이두훈, 교우 윤주하, 회당 장석영, 물천 김진호이며, 학문을 통해 익힌 이치를 사회 개혁에 실천적으로 적용한 유학자들입니다.
1905년 8월 조정에 몸담고 있던 면우 곽종석은 일본이 무력으로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한주학단에 전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계는 회당과 홍와 등과 대책을 논의합니다. 대계는 조정과 나라를 쇄신할 개혁방안을 상소하지만 일본의 봉쇄로 실패하고 그해 10월 조약이 체결되자 도내 유림을 결집하여 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들의 뜻에 찬성하는 300여 명의 유림들이 동참하여 ‘청주적신파늑약소’(일명 청참오적소)를 고종황제에게 올리고 광화문 앞에서 직접 상소의 가납을 주청하지만 일제의 봉쇄로 끝내 전달되지 못합니다. 한주학단을 대표해 대계가 별도로 올린 ‘의전시사소’도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일제는 항소투쟁을 문제삼아 대계와 회당, 홍와를 심문하고, 대계를 체포하여 다음해 4월 8일까지 대구경무서에 구금합니다.
한주학단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되자 적극 동참하여 대계, 회당, 홍와는 성주, 칠곡, 고령의 국채보상의무회가 발족하도록 앞장서고 그 지역 회장으로 추대되어 국채보상 의연금 기부를 독려합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고, 감시와 간섭이 심해지자 대계는 1908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합니다. 대계가 연해주를 기반으로 한흥동 독립운동기지 건설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한주학단에 소식을 전하고, 회당도 1912년 해외 망명을 염두에 두고 간도지역 답사와 대계를 만날 목적으로 만주 여행에 나섭니다. 이 시기에 접한 해외 독립기지 건설 운동과 이주개척지 교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요좌기행>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입니다.
1916년 대계가 중국 선양에서 순국하자 회당은 유족에게 대계의 유해를 성주로 운구하도록 하여 유림장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대계의 유훈을 모아 <대계집>을 편찬합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을 수습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면서 각국은 식민지 처리방안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식민지 독립보다 강대국의 이익을 찾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 독립을 파리강화회의 의제로 제출하기 위해 독립선언서 발표를 추진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독립선언에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이 참가하였고, 유림들의 동참 여부를 타진합니다. 앞서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이후 추진되던 터라 비밀리에 추진된 3.1 독립선언서는 유림계의 참가가 지체되자 부득이 유림계를 제외한 33인의 민족대표 명의로 발표됩니다.
3월 1일 고종의 인산일에 참례하기 위해 전국에서 상경한 수많은 유림들은 만세 시위 현장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의 민족 대표에 유림이 빠졌음을 알고 당혹해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계략으로 친일 유림 몇몇이 독립불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가 있던 뒤라 유림이 빠진 독립선언서는 유림 전체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심산 김창숙은 유림들과 상의하여 유림 독자의 독립청원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심산은 유림단 독립청원 운동을 추진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서한을 작성하기 위해 면우 곽종석에게 외교장서 작성을 의뢰하고 면우는 회당과 김황에게 파리장서의 초안을 부탁합니다. 면우와 심산은 두 사람이 보낸 초안을 비교·검토한 끝에 외교문서인 점을 감안하여 김황의 초안을 보완하여 최종본을 작성합니다. 아울러 영호남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책임자로 심산을 추대합니다.
일명 파리장서운동의 중심에서 심산은 137명의 유림 대표 명단과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국경을 넘어 중국 상하이로 탈출해서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유림단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인쇄하여 파리에 특파된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에게 보냅니다. 심산은 영문으로 번역한 독립청원서를 각국 대사, 공사, 영사관 및 중국 정계 요인들에게 보내고, 해외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항구나 도시에도 배포하고 한문본으로 인쇄하여 국내의 모든 향교에도 보냅니다.
이러한 유림단 독립청원운동을 국내에 널리 알리기 위해 공산 송준필은 <통고국내문>을 작성하여 목판본으로 새겨 삼천 매를 인쇄한 후 4월 2일 성주 장날 읍내 만세 시위현장에 배포합니다. 시위대 규모가 3천 명에 이를 정도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합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의 배후가 유림단 독립청원운동임을 파악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이때 회당은 성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대구 구치소로 이감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합니다. 회당은 이러한 과정을 <흑산일록>으로 남깁니다. 재판 결과, 1심 재판정은 심산, 면우, 회당에게 징역 2년, 공산은 징역 1년6개월, 나머지 관련자들은 징역 1년에서 10개월을 선고합니다. 면우는 옥중에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선고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십니다. 회당은 1심 선고에 불복하여 항소하고, 항소심 재판부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특별히 무죄를 선고합니다.
석방된 후 회당은 일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 성주를 떠나 고향인 각산마을로 이주하였고, 그곳에 녹동서당을 건립하여 제자를 교육시키고 저술에 힘씁니다.
유림단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간 심산은 우당 이회영과 내몽고 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협의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비밀리에 귀국합니다. 심산이 성주지역 모금 대상자로 월항면 대산동 부호 이기병에게 모금을 부탁하기 위해 정수기를 파견하면서 회당을 찾아가 소개장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정수기를 만난 회당은 바로 소개장을 써주고, 그 소개장을 들고 이기병을 방문했으나 출타 중이어서 모금은 실패합니다.
2차 유림단 의거로 불리는 심산의 독립자금 모금사건은 이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전국에서 600여 명이 체포되고, 성주에서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정수기를 이기병의 집으로 안내한 대계 이승희의 아들 이기원이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기원은 회당의 연루 사실을 발설하지 않아 회당은 체포되지 않은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정수기가 체포되어 취조를 당하면서 회당이 소개장을 써 준 사실이 드러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회당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합니다.
위의 내용은 이윤갑 공동대표가 발표한 ‘회당 장석영 선생의 선비정신과 독립운동’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2019년 경북 5월의 독립운동가로 회당 장석영 선생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회당장석영선생기념사업회는 앞서 4월 27일 국조전 광리당에서 회당장석영선생기념사업회 발기인대회를 갖고 공동대표로 덕계 장병홍 선생과 이윤갑 계명대 명예교수를 추대하고 이날 선임장을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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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칠곡군단민회 |
| 이종춘 사무국장이 행사의 사회를 맡았고, 영남대 이동순 명예교수의 축시 ‘회당의 별빛 아래’를 장진명 전 칠곡문협 회장이 차분하고 힘찬 목소리로 낭송했고, 안내와 다과는 칠곡청년유도회 여성회원들이 봉사했습니다.
내빈으로 김진 광복회 부회장, 신동화 총무부장, 정대영 경북지부장, 김영기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운동 선현후손회 회장, 박진 부회장, 유재승 사무국장 과 회원들, 이명식 한주이진상선생기념사업회 회장(전 대구대 교수), 김만환 칠곡군보훈단체협의회장, 정대열 성균관유도회 칠곡군지부장, 김정립 칠곡향교 전교, 이기한 칠곡군 단민회장, 이상욱 담수회 칠곡지회장, 이우석 칠곡군청년유도회장, 이경락 진성이씨 대종회장, 이병구 석담종회 회장, 최진태 영천최씨대종회 회장, 박대율 함양박씨 대구종친회장, 서인돈 박약회 대구지회장, 이수생 광주이씨 묵헌종회, 장재우 인동장씨 대종회장, 장병덕 수석부회장, 장영택 윤리위원장, 인동장씨 황상파 회장, 장성택 인동장씨 전국회장, 장세용 전 구미시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장손인 김진 광복회 부회장은 "회당 장석영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 창립총회를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서거 100주년 만에 창립된 것은 안타까운 일로 지역사회의 무관심과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이라며 경북 칠곡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최전선을 지켜낸 호국의 고장이며, 앞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섰던 독립운동의 성지였음을 선생의 평생에 걸친 독립활동을 통해 알 수 있었으며, 장진홍 선생과 함께 137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고장으로, 선생의 올곧은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역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애써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덕계 장병홍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오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외부의 침략이 900여 회나 있었음에도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은 회당 선생 등 선열의 정신에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요즘 각박하고 이기주의, 갈등, 분열, 불신이 만연한 세상에서 기념사업회가 나라를 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회당 선생의 정신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나라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장세민 회당 선생 주손은 “1865년 15세에 조명탄을 지어 헛된 이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스스로 수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회당의 삶에서 가장 전환점이 된 것은 28세 되던 1878년 회연서원에서 한주 이진상 선생을 만난 것과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청한 상소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회당은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셨다."며 "내년이면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로 기념사업회와 더불어 회당 선조의 유지를 계승·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외에도 김재욱 칠곡군수를 대신해 최윤경 사회복지과장, 이상승 칠곡군의장, 김영기 파리장서운동 선현후손회 회장, 문중 대표로 인동장씨대종회 장재우 회장이 축사를 했습니다. 2부 총회에서 정관을 승인하고, 부회장에 이우석·장세영 씨를, 감사에 이광언 씨를 선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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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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