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전향약(藍田鄕約)의 전래에 대한 고찰
은덕희
I.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웃과 살아가면서 늘 상부상조(相扶相助)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국민교육헌장에도 상부상조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 말의 근원이 어디인가 항상 궁금하던 참이었다. 언젠가는 그 어원을 풀어보고자 하는 서원(誓願)이 있었다. 이번에 한 번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먼 곳이 아닌 가까운 우리 고장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벽진면(碧珍面)에는 수촌(樹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성산여씨(星山呂氏) 집성촌(集性村)으로 여씨향약을 강회하던 월회당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찾아보기로 하였다.
벽진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벽진가야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고을이다. 고을의 역사 중 성산여씨 문중사(門中史)는 면면히 이어져 왔고, 특히 수촌여씨(樹村呂氏)는 향촌(鄕村) 사회의 구심점을 이루는 문중이었다. 이 문중의 월회당(月會堂) 창건 역사가 바로 상부상조의 수촌향약 근원이 된다. 과연 수촌향약은 어디에서 전래되었는가?
그 해답은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선생이 람전여씨향약(藍田吕氏鄕約)을 도입하여 향촌 사회와 조선 사회에 전래한 그 향약의 덕목(德目)에서 유래하였다. 성산여씨의 성주 정착이 그 시초가 된다.
II. 성산여씨 월회당(月會堂)과 람전향약(藍田鄕約) 전래
1. 성산여씨(星山吕氏)의 기원
여씨(呂氏)는 원래 중국(中國)의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강태공(姜太公) 망(望)을 여(呂)의 제후로 봉(封)하고 호(號)를 여상(呂尙)이라 하자 후손들이 姓(성)을 여씨(呂氏)라고 했다.
그의 후손 여불위(呂不韋)의 아들 여영(呂榮)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며, 진시황의 아들은 여부소(呂扶蘇)와 여호해(呂胡亥)가 있다. 여부소는 아들 여몽(呂夢)과 여자앵(呂慈櫻)을 두었다.
여어매(呂御梅)는 여몽(呂夢)의 후손으로, 중국 래주(萊州) 사람이었는데 당(唐)나라 희종(熙宗) 때 황소(黃巢)의 난을 피하여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7年(877) 신라에 들어와서 전서(典書)를 지내고 성주(星州) 벽진(壁珍)에 대대로 살았다.
그의 후손으로 여임청(呂林淸), 여광유(呂光裕) 형제가 있었다. 여임청의 후손으로 여양유(呂良裕), 여자열(呂子列), 여자장(呂子章), 여자혁(呂子赫)이 있었는데 여양유와 여자열은 본관(本貫)을 성주(星州)로 하였고, 여광유의 계통(系統)과 여자장, 여자혁은 본관(本貫)을 함양(咸陽)으로 하였다. 그러나 최근 모두 합본(合本)하여 여씨전국종친회(呂氏全國宗親會)를 구성하였다.
행정구역상 지금의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모두 28성관(姓貫)에 달하며, 성주이씨, 벽진이씨, 성주배씨, 성산이씨, 성주도씨, 경산이씨, 성산여씨...등이 이에 해당된다. 본고에서는 성산여씨의 기원 및 유래, 시조, 대표 인물과 후손 등 문중 전반을 심도있게 파악하고, 경재당(敬梓堂)과 월회당(月會堂) 등 성산여씨 관련 유적을 돌아보았다.
2. 여양유의 성주 정착과정
중국 당(唐)나라 희종(熙宗) 때 한림원 태학사(翰林院 太學士)를 지낸 여어매(呂禦梅)는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에 온 팔학사(八學士) 중 한사람으로 신라 헌강왕 때 현재의 성주 성산군(星山郡)에 세거(世居)하면서 전서(典書)의 벼슬을 지냈다. 여어매가 성산에서 대성(大姓)을 이룬 여씨의 시조(始祖)이며, 그 후예가 성산여씨(星山呂氏)와 함양여씨(咸陽呂氏)로 분관되었다. 가장(家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림학사 신라전서 부군가장(翰林學士 新羅典書 府君家狀)
동국여씨(東國呂氏)란 말은, 중국여씨(中國吕氏)에 대한 상대말로 사용된 것인데, 다른 말로 바꾸면, 한국여씨가 된다. 동국여씨 시조(始祖)라는 말은, 한국땅에 살고 있는, 모든 여씨시조(吕氏始祖)가 서로 같다는 뜻이다.
한림(翰林)이란, 중원(中原)땅 당(唐)나라의 벼슬 이름이고, 전서(典書)란 신라시대 벼슬이다. 신라시대의 벼슬 이름인 전서가, 고려시대에 와서는 상서(尙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라는 벼슬 이름이 보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모두 판서(判書)란 이름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동국여씨에 성산파(星山派)가 있고, 함양파(咸陽派)가 있다.
이들 시조(始祖)의 휘(諱)는 어매(禦梅)이다. 삼가 살피건데 부군(府君)이 당나라 한림원 대학사(翰林院 大學士)로 일하시던 가운데,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에 황소란(黃巢亂)을 피하여, 처자를 거느리시고 신라 땅 동북으로 건너왔다.
이때가 신라 헌강왕(憲康王) 7년이었다. 성산파(星山派) 세보(世譜)에는, 시조(始祖) 어매공(禦梅公)이 신라 말기에, 전서(典書)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시조(始祖)인 전서부군(典書府君)의 아들과 손자들 이름을 모두 모르게 되어, 민망하게 살아오던 가운데, 고려대장군(高麗大將軍) 임청(林淸)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이른바 함양여씨(咸陽吕氏)가 되었고, 고려삼중대광(高麗三重大匡) 양유(良裕)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이른바 성산여씨(星山吕氏)가 된 것이다.
장군공(將軍公)이 전서공(前書公)의 몇 대손(代孫)인지 알 수 없고, 대광공(大匡公)이 전서공의 몇 대손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애석하게도 성산파(星山派)와 함양파(咸陽派)가 함께 세보(世譜)를 하지 못하는, 불행이 있게 된 것이다.
세보(世譜)는 함께 하지 못하나 시조(始祖)가 같기에, 서로를 종씨(宗氏)라고 하면서 왕래한다. 성산은 경상북도 가야산 및 성주고을의 옛 이름이요, 함양은 경상남도 서쪽 지리산 밑 고을 이름이니, 이들 사이 거리는 200리가 못된다. 이들이 모두 영남 땅이고 보면, 동국여씨(東國吕氏)의 뿌리가 영남에 있음이 틀림없고, 그것은 신라시대에 뿌리가 내려졌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성산파 중시조 고려삼중대광 부군가장(星山派 中始祖 高麗三重大匡 府君家狀)
신라전서(新羅典書) 어매(禦梅) 후예(後裔)에 양유(良裕)가 있다. 양유가 곧 부군의 휘(諱)이다. 부군(府君)은 고려 충열왕조(忠烈王朝)에 성주 고을에서 태어나서, 거인진사(擧人進士)로 성주 고을 야동리(冶洞里)에 사셨다.
우왕(禑王) 6년,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부군(府君)이 군량 공급하는 일을 자진하여 맡았다. 운봉대첩(雲峰大捷)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부군에게 내려진 훈호(勳號)가, 삼중대광(三重大匡)이었다.
여기에 대한 것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라는 책에도 실려있다. 군옥(群玉)이라는 책은, 조선 선조 때 학자였던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엮은 것으로 모두 20권이다. 초간은 퇴계문인(退溪門人)이다. 부군의 배위(配位)가 정경부인(貞敬夫人) 벽진이씨(碧珍李氏)인데, 동정(同正) 이창간(李昌幹)의 딸이요,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외손녀이다. 부군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이 위충(渭忠)이요, 차남이 위현(渭賢)이다. 위충은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위현은 판도판서(版圖判書)가 되었다. 위충이 4남 1녀를 두었는데 희덕(希德), 희철(希哲), 희복(希福), 희정(希正)이 그 차례이다. 희덕은 전서(典書)이고, 희철은 부윤(府尹)이고, 희복은 소감(少監)이고, 희정은 부정(副正)이었다. 1녀가 한천부(韓天富)의 아내가 되었는데 중랑장이었다.
위현(渭賢)이 2남을 두었는데, 극인(克禋), 극회(克誨)가 그 차례이다. 극인이 한성윤(漢城尹)이고, 극회가 공조판서(工曹判書)였다.
부군(府君)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세보(世譜)가 이룩되기에, 부군(府君)이 이른바 성산여씨(星山吕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는 것이다.
부군(府君)의 묘(墓)를 잃어버렸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묘(墓)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해마다 한식(寒食)날 경재당(敬梓堂)에서, 처사(處祀)로 행사(行祀)한다. 경재당(敬梓堂)은 부군(府君)의 재사(齋舍)이며, 성주읍 북쪽 야동리(冶洞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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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진면 월회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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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성계(李成桂)와 조선건국
전서공(典書公) 이후 누대(累代)가 실전되었다. 고려(高麗) 말엽에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현재 성주읍 백전리(柏田里), 681번지 지역 야동리(冶洞里)에서 출생한 여양유는, 고려 홍무(洪武) 경신(庚申) 우왕(禑王) 6년(1380)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운봉(雲峯)에 침입한 왜군(倭軍) 왜장(倭將) 아지발도(阿只拔刀)를 토벌할 때 이성계가 변안렬(邊安烈) 등 용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성주 공의 집에 친림(親臨)하여 탄반(攤飯)으로 점심을 들고 오수(午睡)를 취하고 피로를 회복 후에 대책을 세우니, 군량(軍糧)을 공급하는 운량호군(運糧護軍)을 스스로 맡아 운봉전투(雲峯戰鬪)를 승리로 이끄니 이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하였다.
이를 두고 그 뒤 조선 태조(太祖)가 건국 후에 벼슬에 등용하고자 수차례 불렸으나, 학문에만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삼결(三結)의 복호(復戶)를 내렸다. 야동의 옛터에 옛 우물 고정(古井)이 있었으니 샘의 밑바닥에 려정(吕井)이라 두 자를 각자해 놓았으나 병란으로 실전되었다. 여양유는 절행(節行)이 고매(高禖)하고 문장이 뛰어나 야은(冶隱) 길재(吉再),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도의(道義)로 교우(交友)하였다.
후에 벽진면(碧珍面) 수촌리(樹村里) 월회당(月會堂)에서 향사를 지내다가 후손들이 을사(乙巳, 1965)년에 여양유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성주읍 백전리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후손들이 경재당(敬梓堂)을 창건하였다. 이 곳은 여양유가 살았던 곳으로, 매년 한식일(寒食日)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