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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悲運의 高麗忠臣 金得培 장군(2), 상주낙양동 원허비터 김득배 살던 집터 아니다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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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계 김득배 생거지 비 제막식(2017년 12월 5일)

2편에 이어

悲運의 高麗忠臣 金得培 장군(2), 상주낙양동 원허비(遺墟碑)터 김득배 살던 집터 아니다


이창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문경)


Ⅲ. 상주낙양동 김득배(金得培) 장군 원허비(遺墟碑)터 김득배 살던 집터 아니다

 김득배(金得培) 장군(將軍)은 지금까지 상주(尙州)인물로 역사에 기록돼있고 현재(現在_도 상주문화원(尙州文化院) 발간(發刊)(2016) 상주(尙州)의 인물록 첫장에 김득배 삼형제가 상주사람으로 발표돼있다. 또한 상주시 낙양동에 있는 원허비(遺墟碑) 터가 김득배 형제가 살던 집터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그는 영락없는 상주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간간히 몇줄씩 그가 산양현(山陽縣) 깃골 출생자 또는 산양현 영강빈(潁江濱) 출생(出生) 또는 용궁현 깃골 출생(出生)자라고 쓴 곳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문경에서 어느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고 나서서 그가 상주사람이 아니고 문경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근간에 문경시(聞慶市)에서 출간한 문경의 인물 열전에도 김득배(金得培)는 없었다.
이에 필자(筆者)가 6년여에 걸쳐 심층(深層) 조사한 결과 그는 살아 생전 현 상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따라서 그가 살던 집터로 알려진 낙양(洛陽)동 원허비(遺墟碑) 터에도 산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서 김득배(金得培) 장군(將軍)은 순수 문경(聞慶)사람이며 현 문경시 흥덕동 깃골에서 출생(出生)하고 성장(成長)했으며 장군(將軍)이 되어 난(亂)을 평정(平定)한 후에도 그의 선조(先祖)때부터 수백년(數百年)을 자자손손(子子孫孫) 살아오던 고향(故鄕) 문경(聞慶)에 세거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상주(尙州)와의 인연(因緣)을 말한다면 간신(奸臣)의 계략(計略)에 누명을 쓰고 문경에 있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곳이 상주 입구 병성(屛城)이 처음이다. 당시 관아가 상주에 있었으나 상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한순간의 악연(惡緣)이 있을 뿐이다. 상주의 어느 사가(史家)는 김득배(金得培)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고려사(高麗史)와 집에 전하는 문적들을 가지고 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 기록이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계속해서 잘못이 답습되어 이어지는 것이다.

 김득배(金得培)가 상주인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당시 문경이 상주목(尙州牧)의 속현(屬縣)이었고 김득배(金得培)의 본관(本貫)이 상주이며 상주에서 사망했고 상주땅에 묻혔기에 그런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득배(金得培)는 절손(絶孫)이 된 반면 문경에서 상주로 진출한 아우 선치의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상주에 거대세거지(巨大世居地)를 형성하게 됨에 따라 본향(本鄕)인 문경(聞慶)보다 상주(尙州)가 본향(本鄕)인 듯한 느낌을 갖게 된 영향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문경(聞慶)의 행정구역이 독립군(獨立郡)이 된 지가 백여년이 지났음에도 상주인으로 고착화(固着化)되었음은 황당스럽기 그지 없다. 앞으로 이러한 잘못된 역사기록들을 바로잡아야 할 책무가 바로 문경 사가(史家)들에게 있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따라서 김득배(金得培) 장군(將軍)이 상주인물(尙州人物)이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대로 쓰고 기록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며 사가(史家)로서 양심(良心)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는 앞으로 상주(尙州)의 인물록(人物錄)과 문경(聞慶)의 인물록(人物錄)을 다시 써야할 부분들이다. 그럼 여기서 김득배(金得培)의 행적과 뿌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상산김씨(商山金氏)는 본관(本官)을 본래 상주(尙州)로 불러 오다가 첫 대동보(大同譜)인 계미보(癸未譜)가 발간(영조39년 1793) 되면서 본관(本貫)을 상산(商山)으로 바꾸었다. 상산김씨(商山金氏)의 시조(始祖)는 김수(金需)로서 신라 56대(代)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후손으로 고려 초엽에 보윤(甫尹) 벼슬을 역임하시고 누대를 상산에 세거(世居)하시어 본관을 상산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조(始祖) 보윤공(甫尹公)의 생거지(生居地)는 어디일까?

수백년의 세월(歲月)이 흐르면서 선대(先代)의 묘소들이 실전(失傳)되었기에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상산김씨(商山金氏) 족보에서 선대(先代) 인물들의 생몰연대와 기록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는 대체로 시조로부터 8세(世)에서 11세(世) 사이의 손으로 11세(世)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의 파조(派祖)들이기도 하다. 

 이 세대의 묘가 산재(散在)해 있는 곳이 강생포(康生浦)다. 문중원로들에 의하면 강생포는 문경시 영순면 말응리 원호동 먼갓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은 옛날 상주의 무림부곡(茂林部曲)의 영역이 있던 자리다. 부곡(部曲)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존속한 특수지방 행정구역으로 일종의 천민집단 거주지역에 해당한다. 부곡은 특히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이들의 대다수는 대체로 고려 개국초에 고려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정복전쟁(征服戰爭)에서 패한 부복신민(不服臣民)이거나 투항 또는 귀순한 집단지라고 한다. 

 상산김씨(商山金氏)들은 적어도 8-11세(世) 이전부터 고려의 부곡땅에 부곡지역민으로 전락해 시조 이후 300여년의 침체기를 겪으면서 이곳 현재의 영순 말응일대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상산(商山)은 고려 성종2년(982)에 상주(尙州)를 상산(商山)으로 호칭한 바 시조(始祖) 윤보공(甫尹公)이 출생하기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생활터전이 문경시 영순면 말응이면서도 관향(貫鄕)을 상산(商山)으로 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실타래가 풀린다.

 상산김씨 족보에 따르면 영순 말응 강생포에는 8세(世) 지연(支衍), 10세(世) 록(綠), 11(세)世 원리(元理), 13세(世) 보개(甫介), 추(錘) 등의 선조(先祖)들 묘소가 있으며 그 이후에도 후손들이 다시 들어 왔다가 묘를 남기고 떠난 흔적들이 산견(散見)되고 있다 하며 이 곳의 공식지명은 경북 문경시 영순면 말응리 원호동이다. 따라서 실제(實際)대로라면 상산김씨(商山金氏)의 본향(貫鄕)은 문경 말응(末應) 김씨(金氏)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대가 천민집단 거주지인 부곡(部曲)지역이었으므로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본관(本貫)으로 택함을 꺼려했음이 유추되는 부분이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그들은 문경 영순 말응의 선향(先鄕)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벗어나려는 신분회복의 심리에서 상주, 상산을 고집했는지도 모른다. 관향(貫鄕)은 한 종족(宗族)의 시조(始祖)가 탄생한 고향으로서 관향(貫鄕)을 알면 그 신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부곡민(部曲民)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다행히 고려 원종(1290)에 이르러 이 곳에 살던 발해유민 태금취(太金就) 장군이 몽고병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부곡(部曲)에서 영순현(縣)으로 승격되어 규제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김득배의 조부 김일은 원종 14년(1273) 영순 부곡촌을 떠나 기골로 이주한 후 원나라로 들어간 것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기골에 사람이 살게 된 지는 약 800여년 전후로 추정이 된다. 원호(遠湖)라는 어원(語源)은 고려때 축조한 현재의 원호지(遠湖池) 이름에서 비롯된 것인데 먼옛날 원호지사(遠湖志士)가 살았던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는 상산김씨의 선대조상이라는 게 이곳 향토사학자 홍재덕(洪在德)씨의 견해이다. 건너다 보이는 저 마을이 상산김씨(商山金氏) 선대(先代)들이 살던 원호동(遠湖洞,먼갓)인데 지금은 모두 넓은 도시로 떠나고 조선조(朝鮮朝)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홍귀달(洪貴達)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림계(缶林(溪)) 홍씨(洪氏)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홍귀달은 함창 양적리 사람으로 상산김씨 김선치(金先致)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어 시묘(侍墓)차 왔다가 이 곳 처가(妻家)곳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뒷날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아 홍씨들의 오랜 터전이 되어 왔다. 원호동 언덕 너머 도로변에 상산김씨를 부인으로 둔 홍귀달의 묘가 있다. 그는 손녀입궐(孫女入闕) 거절, 불경죄(不敬罪)로 유배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따라서 김선치(金先致)는 후대에까지 이 마을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지명(地名) 먼갓은 부림홍씨들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나뭇가지처럼 멀리 뻗어 번창하길 바라는 의미로 원호지(遠湖池)에서 호(湖)자를 빼고 지(池)자를 가지지(枝)자로 바꾼 이름이라고 한다. 원지(遠枝)의 한자의 의미를 한글로 고쳐 먼가지-먼갓-멍갓이 된 것이다. 이 곳은 족보(族譜)에 강생포(康生浦)라는 다른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고려말 김득배의 아우 김선치가 두문동을 나와 이 곳 고향 말응 먼갓으로 낙향하여 편안히 살만한 곳이라며 여생을 보낸데서 유래(由來)된 지명(地名)이다. 

 우선 상산김씨들의 선대 묘들이 현재 원호동 먼갓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 외에 공민왕1년 정치개혁(政治改革)에 부담을 느낀 조일신의 무고로 김득배 선생이 4년 남짓 낙향해 있었던 곳도 지금의 문경시 흥덕동 깃골이었고, 간신(奸臣) 김용의 계략으로 피신했던 산양현(山陽縣) 선영(先塋) 산막도 사실은 이 곳 원호동 먼갓 선영(先塋) 산막이며, 김득배의 가족들이 김용의 수하들에게 붙들려가 문초를 받던 곳에 용궁(龍宮) 관아로 처(妻) 서흥김씨가 남편을 여의고 입산했다는 곳도 문경의 윤필암이며, 선조들의 묘가 문경의 깃골 뒷산 반곡, 산양, 호계, 돈달산 밑 공평 일대에 산재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김득배와 그 선대들의 활동무대는 지금의 상주가 아니고 문경지역의 토착민으로 먼 옛날부터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으며 상주땅으로 입성하게 된 것은 11세(世) 김선치의 증손 14세(世) 김팽수부터이며 지금까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상산김씨의 뿌리는 모두 문경시 영순 말응 무림일대. 시조(始祖) 보윤공(甫尹公)의 후손이라고 문중원로(門中元老)들은 전(傳)한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역성(易姓) 개국으로 고려를 잃게 된 김득배의 아우 득재, 선치 형제들과 김원리(金元理) 전서공파조(典書公派組) 등이 불사이조(不事二朝)의 절의 정신으로 낙향하여 함께 이 곳 원호동을 강생포(康生浦)로 이름짓고 낙동강가에 낚시를 드리우며 여생을 마친 곳이다. 이같은 근거는 숙종30년(1704)에 세운 김선치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원호동에 물러나 낙동강 물가에 낚시를 드리우며 스스로 절개를 보전하시니... 라는 구절이 있고 영조44년(1768)에 세운 김득제(金得齊)의 단비(壇碑)에는 삼원사(三元帥) 김득배 형제의 출생지가 산양현(山陽縣)  깃골 영강빈(潁江濱, 깃골이 영강 곁에 있다)이라고 하는데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호동에서 여생을 마친 김득제의 단소(壇所)는 원호동 인근 문경시 산양면 백동에 있으며 며느리도 옆에 묻혔고 아들도 앞산에 누워 있다. 돈달산 밑 흥덕에 군인아파트를 지을 때도(2014) 그 터에 산재한 묘들이 모두 상산김씨들의 묘였으며 기골 동네 뒤 동산(童山)은 원래 상산김씨들의 소유였는데 그 곳에도 상산김씨 선대의 묘가 산재해 있었으며 매매가 되어 현재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당시 묘를 이장하기 위해 중장비로 파니 회곽으로 굳어져 파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묘는 고려 분묘형식인 방분형(方墳形)으로 둘레에 호석(護石)이 처져 있었다. 필자는 현장에서 혹시 미라가 나오거나 어떤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지켜 봤으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고 일반 분묘보다 토광의 넓이와 깊이가 2배 이상 되었으니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큰 인물의 묘로 추정되었다. 아마도 김득배 장군이 처형될 때 그의 시신을 모시기 위해 문중에서 준비했던 묘터로 추정된다. 

 이상의 정황 증거로 살펴보더라도 김득배의 가계는 아들 손자 대까지 문경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현재 상주시 일대에 세거(世居)하고 있는 상산김씨는 선치의 14세(世) 후손(後孫) 상주 오가실 입향조(入鄕祖) 김팽수 이후의 후손들이다.(후손 김명균 증언) 여기에서 산양현(山陽縣) 용궁현(龍宮縣) 깃골 양강빈(潁江濱)이라는 말이 어느 기록에서나 나오는데 사실은 모두 잘못된 내용이다. 깃골은 산양현에 속했던 사실이 없고 다만 영강을 경계로 강 건너는 산양현이요 강 안쪽은 호계현(虎溪縣) 깃골이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기골은 견탄, 조령, 주흘산 맥(脈)과는 별개로 속리산에서 뻗어나온 갈영(葛嶺) 작약지파(芍藥支派,이안뒷산)의 돈달산 동쪽 끝자락으로 영강(潁江)이 감싸안은 천하명당길지(天下明堂吉地)이다. 영순 말응 먼갓은 1914년 한때 용궁서면(龍宮西面)에 병합된 적이 있으나 용궁현(龍宮縣) 역시 깃골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잘못된 기록이다.

 신라말 특수천민 지역인 영순 부곡(部曲)이 고려 원종(1260) 때에 영순현(縣)으로 승격되면서 원호동에 속해 있던 부곡(部曲)을 다스리던 깃골로 이주해 온 상산김씨 가문에서 김득배 형제들이 크게 흥기한 마을로 김선치(金先致) 선생이 학동(學童)시절 사용하던 벼루가 이 마을 우물에서 수습됨으로써 상산김씨의 중간기류지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부분이다.

 어떤 학자는 영순 원호동에서 점촌 흥덕 깃골 일대를 거쳐 상주 백원 내서면 관동리를 거쳐 상주시 중심으로 입성하는 단계적 과정으로 파악된다고 하였으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원 관동리를 거쳐서 상주로 입성한 것이 아니라 11세(世) 김득배 형제, 12세(世), 13세(世)까지는 문경 깃골 일대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 근거로 김득배 형제가 크게 현달한 후부터 차츰 선진문식(先進文識)에 눈을 뜨게 되면서 증손 14세(世) 김팽수가 상주시 외서면 오가실로 첫 이주하면서 입향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오가실 뒷산에는 입향조 김팽수 15세(世), 16세(世), 17세(世) 김선치의 후손들이 모셔져 있고 인근 개운동에는 봉의제실(鳳儀祭室)과 시조(始祖) 보윤공(甫尹公) 김수(金需)의 단소(壇所)까지 모셔 오가실과 개운동을 상산김씨의 본거지로 삼고 있다. 즉, 김득배 형제의 증손이 첫 오가실 입향조가된 것으로 볼 때 김득배 형제와 그 손자대(孫子代)까지는 아직 문경에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부분이다.  이 오가실 증손들이 번성하여 지금의 외서면 관동리로 분가, 이주하여 또다른 집성촌을 이룬 것이 18세(世) 후손들부터이다. 즉 오가실로 첫 이주하여 관동리를 거쳐 상주 중심으로 입성하게 되는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산김씨의 원뿌리는 문경 말응 깃골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종족(宗族)임에도 현재 문경에 대하여는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상주가 본향(本鄕)인 듯 착각을 하게 하는 이유는 재차 논하지만 당시 문경이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으로 되었던 정서가 현재까지도 통속화되어 있고 또한 상산김씨들 자체가 김득배 형제가 크게 현달한 후부터 명문세족(名門勢族)으로 번창하면서 득배는 후손이 없어 그 배후가 급격히 소멸되었고 막내 아우 선치(先致)가 아들 다섯을 두니 상주로 이주한 후손들의 세력이 번창하여 중간 기착지인 상주가 본향(本鄕)인 듯 조상들의 세거지(世居地)로 삼게 됨으로써 비롯된 현상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백원 관동리는 현재 그 동네 이름이 구호(龜湖), 깃골이다. 그들은 선조(先祖)들이 살던 원뿌리가 문경시 흥덕동 깃골이라 그 뿌리를 잊지 않고 그 맥(脈)을 이어가기 위해 동네 이름을 깃골이라고 짓고 이 곳을 작은깃골 문경깃골을 큰깃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문경 흥덕깃골과 관동리깃골에 구호(龜湖)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원호(遠湖)라는 한자 지명과도 아주 유사한 의미 즉, 원(遠)→구(久)→귀(龜)가 깃골과 관동리 지명에서도 같이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아보면 상산김씨들이 원호동을 나와 상주로 이주하는 통로를 따라 파생된 지명, 일화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깃골은 본시 기곡(箕谷, 貴谷, 龜谷, 龜湖)이다. 당시 상산김씨들이 상주의 대표적 명문(名門)으로 발전하면서 중국(中國)의 섬서성(陜西城)에 있는 현인달사들의 은둔지소로 알려진 상산(商山), 영수(潁水), 기산(箕山)을 본떠서 상산, 영강, 기곡이라 하였다,라고 태촌 고상안의 남석정기(南石亭記)에 전한다. 이에 기곡(箕谷)을 우리식 차음 표기인 기골로 쓰나 원말이 뒤로 밀려 쓰지 않고 깃골로 변음(變音)되어 부르고 있다. 
 
 맏이인 김득배는 딸만 다섯을 두니 대를 잇지 못하고 절손(絶孫)이 되었다. 그 후 오백년이 지난 조선조에 와서 막내아우 선치(先致)의 넷째아들 승귀를 형식적으로 백골(白骨) 양자로 올렸다. 그 옛날 승귀(承貴)가 김천시 어모면 여남으로 이주하여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 여남에서 분가하여 또 다른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 문경시 호계 구산(龜山)이다. 이 곳 역시 구자(龜字)를 쓴 것도 무관(無關)치 않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산김씨들은 상주 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김천시 어모면 여남, 상주시 외서면 오가실, 백원 외서 관동리, 호계 구산, 산양 형천, 괴산 등등 외곽지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고, 그 후 현 상주시 낙양동 유허비는 김득배 사후(死後) 450여년(餘年)이 지난 조선조(朝鮮朝) 순조때(1811) 김득배 선조의 현창사업을 하면서 득제, 선치 두 아우의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땅을 마련하면서 비(碑)를 세우면서 비문(碑文)의 명(銘)은 우복 정경세의 후손 입제(立齊) 정종로(鄭宗魯)가 짓고, 강고(江皐) 류심춘이 쓰면서 비(碑)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형식상 김득배가 살던 터라고 기록한 것 뿐 김득배가 그 터에 실제로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낙양동 유허비가 서있는 지역은 4-5백년 전에는 인가(人家)가 없는 허허벌판 황무지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내용을 그간 10여년에 걸쳐 조사하여 선조(先祖) 김득배(金得培) 선생 평전(評傳)을 집필한 서울파조회장 김상흠 외 서울종친회장 김원섭, 부회장 김영호, 대종회장 김장희 외 각 파조대표들의 일관된 의견으로써 본(本) 필자(筆者)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김득배(金得培) 인물(人物) 현창사업에 따른 바른자료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밝혀졌고 그 사실을 지난 2016. 3. 16일 필자(筆者)가 서울까지 올라가서 파조(派祖) 대표들의 자필서(自筆書)를 받아 왔으며 이를 첨부(添附)하고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남긴다.

 역사는 사실을 왜곡 굴절됨 없이 있는 그대로 명기(明記)해야 그 가치(價値)를 지니게 된다. 본(本) 필자(筆者)는 지난 수년간 영순 말응, 원호동(遠湖洞), 원호지(遠湖池), 강생포(康生浦)도 답사했고 상산김씨들의 첫 족보 기록에 등장하는 선조(先祖)들의 묘소와 각 파조 후손들의 집성촌도 발품을 팔아 현지 조사 답사를 했고 각파조(各派祖) 대표들도 모두 접견, 견해(見解)를 들었다.

 김득배의 묘소는 상주 오갈미 마을 입구에서 좌측 산너머 상주대학 바로 뒤로 추정되어 수차례 조사를 했으나 공동묘지군으로써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한편 대학교수들 숙소를 건립하면서 많은 고분들이 유실되었다고 하니 더욱 그 단서를 찾을 길 없어 허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가지 정정할 일은 필자(筆者)가 2013년 문경문화(聞慶文化) 97호, 98호에 연재한 고려 김득배 재조명,이라는 논문에서 조일신의 무고로 낙향해 있을 때 김득배가 깃골에서 현 상주 낙양동 유허비터로 이주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당시 필자는 비문내용만 보고 그렇게 믿었지 더 깊은 사실은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 심층조사과정에서 상산김씨 파조회장, 서울종친회장, 상산김씨 대종회장 등 김득배 평전 집필진 전문가(專門家)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득배는 상주 유허비 터로 이주한 사실이 없고 유허비터가 있는 지역은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허허벌판 황무지였으며 근 오백년이 지난 조선조에 와서 후손들이 그 곳에 땅을 마련하고 작은 비석을 세운 것이며 현재의 대형(大形) 유허비는 1978년에 유허비 터로 대로(大路)가 나면서 옮겨 다시 제작해 세운 비(碑)임을 정정 발표한다. 역사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바로 알기란 쉽지 않다. 구름처럼 그저 흘러갈 뿐이다.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집필자의 학술적인 견해로 다른 연구자와 견해차를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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