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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48호분은 1920년대에 조선총독부(조선고적연구회)에서 11월경, 10일 정도 조사기간이 소요됐으며, 야쓰이 세이이쓰 외 2명이 조사자로 나섰다. 봉분 1차 굴착조사에서 정부에서 수직으로 파내려 주곽이 노출되었고, 주곽의 개석을 이동 후 바닥을 노출하여 대호를 1점 수습했다. 2차 굴착조사에서는 봉분 측면을 굴착하여 부곽을 확인했고, 부곽 노출을 위해 봉분 굴착범위를 확장했다.
부곽 조사는 개석 3개를 주곽 쪽으로 밀어내고 남에서 북으로 순차적으로 유물을 수습하였다. 부곽에서는 발견 당시 300여점의 유물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었다. 단계별로 촬영 및 도면을 작성하고, 방안설치에 사용한 못을 확인했다. 발굴 당시 현장에서 유물노출 상태를 주민들에게 공개하였다. 조사 후 원상이 남아있던 주곽 북단벽 쪽은 벽석재를 사용해 다시 쌓아 복구하였다. 조사한 구덩이는 굴착한 봉토로 되메워졌다. 1921년 1월 정밀하게 실측한 도면을 제도하였다. 주곽은 고분이나 묘에 안치된 사람을 위한 공간이며, 부곽은 그 주변에 유물을 보관하는 공간이다.발굴조사 결과, 48호분의 경우, 주·부곽 조사 후 교란구덩이를 발견했다. 48호분의 외형은 그대로지만 내부는 실제로 많이 훼손되었다. 재발굴을 통해 48호분의 축조 방식과 규모를 확인하였다. 발굴조사는 봉분 남쪽 삭토 후 수직으로 파내려가 주·부곽을 확인했다. 주곽 축조방법은 묘광을 조성한 후 바닥석을 깔고, 네 벽을 축조한 후 위에 개석을 얹고 상부에 돌을 쌓고 밀봉토로 덮었으며 그 위에 봉분을 성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주곽의 크기는 길이 362, 너비 138, 길이 188cm이다. 주곽의 북단변은 원형이 남아 있었으나 남단벽과 서장벽은 도굴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주곽에서는 대부분 토기 편(조각)들과 못(1920년대 발굴시 쓰인)이 발견되었고, 대도 장식 일부가 발견되었다. 부곽의 축조는 주곽과 동일하지만 바닥석을 깔지 않은 점만 다르다. 부곽의 잔존 크기는 길이 441, 너비 118, 깊이 84(단위 cm)이다. 부곽의 동장벽은 원형을 유지하나 서장벽과 남단벽은 훼손되었다. 부곽에서도 토기 조각들과 말장식이 발견되었다 주곽은 1920년 발굴 당시에 이미 도굴로 인해 유물이 거의 사라지고 대호 1점만 보고되었다. 주변에서 석실묘를 발견했으며, 묘광 575x420x88cm, 현실 430x130cm이다.횡구부의 위치를 확인하였고, 금제 이식과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금제이식은 경주 천마총의 금제이식과 견줄 수 있는 유물이며, 은제 귀고리는 성주에서 자체 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석실묘(돌방무덤) : 지하에 묘광을 판 후 돌을 이용하여 무덤방을 만든 매장시설. 48호분 축조는 3단계로 묘역 조성 후 매장주체부를 구축하고 봉분을 성토하였다. 묘역 입지는 성산의 북서 사면 끝자락 돌출부에 성주읍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 실제 성토량보다 시각적으로 더 거대하게 보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 묘역 조정은 구지표와 기반암층을 자연경사에 따라 다듬거나 삭토하였고, 묘역에 점토를 10~15cm 두께로 깔아 정지하였다. 점토는 인근 논에서 채취한 흙으로 추정되고, 정지층 위·아래서 확인되는 목탄띠는 불과 관련된 의례 행위로 추정된다. 매장주체부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하여 11자형 주·부곽식 구조로, 할석을 평적하여 주곽을 쌓은 후 부곽을 축조했다.
봉분 성토에서 기초성토(주·부곽 밀봉 이전)는 주·부곽 구축과 함께 봉분 주변부를 양파형 또는 수평형으로 성토하였다. 봉분 중심을 향하는 할석열을 확인했고, 이 단계부터 구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성토(주.부곽 밀봉 이후)는 주곽 중앙을 기준으로 방사상으로 12개 단위로 구획하여 서로 다른 이질토로 수평 성토하였고, 2차 성토는 1차 성토와 동일한 구획 단위로 수평 성토했고, 1차 성토 봉토보다 색조, 점성, 입자 등 차이가 있다. 또 상부 봉토의 구획선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서로 다른 흙을 수평으로 쌓아올린 것을 확인했다. 여러 교란구를 발견하였다. 봉분 표면을 피복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피복층이 유실되어 확인되지 않는다. 기술분석 결과, 성토에 동원된 인원은 580여 명이고, 소요일수는 32일로 추정된다.
48호분의 원형 및 규모는 기존 성산동 고분(15~20m)과 비교해 거대 규모로 대분으로 불린다. 규모는 직경 34~35m, 높이 5~11m이다. 조사 후 기반층을 삭토한 봉분 하부와 그 위를 성토한 봉분 상부로 구분했다. 봉분 하부(삭토부)는 직경 34~35m, 높이 1~6m이고, 봉분 상부(성토부)는 잔존 동서 16.8m, 남북 18.8m, 높이 4.3m이다. 성토부가 48호분 조성 당시 원 봉분으로 추정되고, 봉분 중위 성토 기저부에 돌려놓은 호석을 확인했다.
주·부곽이 성토부 중앙에 위치(삭토부로 보면 남쪽에 치우침)하고, 성토 기저부, 주곽 바닥, 호석 높이가 67m 내외로 비슷하다. 성토부 구획 단위 중심점이 주곽 중앙에 위치하고, 주·부곽 규모와 축조방법이 타 고분보다 우월하거나 특징적이지 않다고 본다. 48호분 원 봉분은 호석을 기준으로 직경 21m 정도로 추정된다.봉토분을 성토하는 방법은 성산동 고분군의 경우, 방사상으로 구획한 후 이질토로 수평 단계별로 성토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질토를 좌우로 교차하여 성토하면서 나타나는 단면 지그재그선으로 구분된다. 구획선인 토낭(토괴)과 할석열을 확인했고, 구획 단위 내 평면상 소구획선이 확인되기도 했다. 성토재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사이다. 48호분도 동일한 성토 방식이다.주·부곽의 배치는 11자형, 明자형, 凸자형으로 규칙성은 없다. 주곽 벽 축조는 할석을 평적하고 대형 판석을 수적(세워서 쌓음)하고, 할석은 평적(48호분 북단벽, 동장벽)했다.조사 결과, 성주 성산동 48호분은 1920년 조사되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보고되지 않아 고분의 규모와 성격, 고분군의 가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재조사 계획하였다. 1920년 조사가 봉분 정부에서 거의 수직으로 파내려가 개석을 들어내고 유물을 수습하는 거친 굴착방식이었던 것을 확인했고, 48호분은 구릉 최하단 돌출부를 선정하여 삭토와 정지 등 묘역을 조성한 후 묘광을 굴착하고 구축토와 함께 기초 성토하면서 주·부곽을 축조, 그 후 개석을 얹고 밀봉한 후 서로 다른 이질토로 구획, 성토하여 봉분을 조성하였다. 호석과 잔존 성토부로 볼 때 축조 당시 원 봉분은 직경 21m로 추정되고, 수습된 유물로 볼 때 48호분은 5세기 후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조사로 48호분 구조와 축조방식을 명확히 파악하고 1920년 발굴방식과 그 이전에 이미 주곽이 도굴된 사실을 확인한 점 등이 이번 재발굴 조사의 성과라고 정리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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