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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의병전적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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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소천전투(화장산전투)와 류종개 의병장(1)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봉화)
Ⅰ. 임진왜란 발발과 소천전투(화장산전투) 직전의 상황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25년(1592)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발생한 임진왜란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평안도 방면으로,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倭敵)은 함경도를 유린했다.
당시 강원도를 담당한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일본군 제4군 1만4천명은 5월 19일 한성을 떠나 북상하여 임진강에서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자등현을 넘어 강원도를 침략했다.
이후 김화, 금성을 경유하여 6월 5일 회양부사 김연광(金鍊光)을 참살하고 회양부를 장악했다. 이어 6월 12일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인 철령에서 함경도 남병사 이혼(李渾)의 군대를 격파하고 안변부로 진입했다.
모리의 일본군은 17일 가토 기요마사의 2군과 합세한 뒤 다시 원산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흡곡(歙谷)에 도착한 뒤 강원도 전역에 격문을 보내 자신이 강원도를 통치할 것이니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이후 1개월 동안 강원도에서의 지배권 강화에 주력한 모리는 7월 상순 삼척에 도착한 뒤 계속 남하하여 평해와 울진을 거쳐 경상북도 영해부로 진군했다.
일본군은 울진에서 군대를 나누었다. 1대는 동해안을 따라 영해 방면으로 계속 남하하고, 2대는 울진에서 서진하여 태백산맥을 넘어 예안 일대로 침입했다. 울진에서 계속 남하하던 일본군 1대는 영해에서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에게 격파되었지만, 2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체 예안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군했다.
당시 경상북도의 산협(山峽)과 해빈(海濱)의 10여 고을은 일본군의 진군로와 동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전화를 모면했다. 사족들은 괜히 군대를 모았다간 적을 불러들일 게 뻔하다고 여겨 험한 지역을 의지해 병란을 피할 뿐 전혀 군사를 모으지 않았다.
Ⅱ. 의병장 류종개와 의병 결성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의 관직에 있다가 부친의 상을 당하여 향리(본가 예안현 서면 가야리(現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가야마을), 처가 봉성현 문촌리(現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기촌마을))에 와있던 류종개는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40일 만에 평양성을 함락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을 알고, 7월 9일 근동에 살던 생원 임흘(任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지어서 여러 고을에 돌리자 몇일 사이에 인근지방 선비들과 주민들을 포함 의병 600명을 모집하였다.
의병들은 류종개를 추대하여 창의대장(倡義大將)을 삼고 임흘(任屹)을 부장(副將)으로, 참모장에 김인상(金麟祥), 장서(掌書)에는 윤흠신(尹欽信), 군관 권경(權檠) 등으로 하여 진중규약 16조와 군령 7조를 정하는 등 조직적으로 전력을 가다듬고 훈련하여 대항 태세를 갖추었다.
동몽교관 용담임공묘지명(童蒙敎官龍潭任公墓誌銘)에 따르면, 류종개는 박승임(朴承任)의 문인이었던 임흘(任屹)의 주도하에 내성,법전,소천에서 거병한 수백 장정들의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임흘이 정한 16조목의 진중규약을 세웠다고 한다. 16조목의 진중규약 중에서 묘지명에 적힌 것은 10가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거짓된 말을 하지 말고, 2. 놀라서 움직이지 말고, 3.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4. 해괴하게 장난하지 말고, 5.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지 말고, 6.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능멸하지 말고, 7. 공을 자랑하지 말고, 8. 어려움을 사양하지 말고, 9. 뜻이 다르고 같음으로써 즐거움과 노여움을 삼지 말고, 10. 즐거움과 노여움으로써 향하거나 등지지 말 것이다.
부장 임흘은 또 7조목의 군령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북소리를 들으면 나아가 싸우고 징소리를 들으면 그쳐야 한다. 2. 북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전진은 있을지언정 후퇴는 없으며 함부로 후퇴하는자는 벨 것이다. 3. 징소리가 두 번 들린 연후에 후퇴할 것이요 후퇴함에 뒤지는 자는 벨 것이다. 4. 군중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벨 것이다. 5. 모이는 기한에 늦게 이르는 자는 벨 것이다. 6. 사사로이 민간의 물건을 취하는 자는 비록 그것이 작더라도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 7. 군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줄 것이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줄 것이다.
이렇게 류종개 의병장은 의병들을 모집하고 훈련을 시키면서 적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Ⅲ. 소천전투의 의의
임진왜란 당시 소천지역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는 노영구 국방대학원 교수의 논문 '임란기 봉화 소천 지역의 전투와 항쟁 활동'에 학술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노영구 교수는 “소천 전투와 이어지는 방어전의 성공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이 좌절되면서 이 지역은 안정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동별읍항병과 같은 대규모 의병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경상도 지역 조선 반군의 주요 근거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소천 전투를 계기로 일본군의 경상도 북부 지역 장악은 불가능해졌고, 이 지역을 발판으로 한 조선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경상도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과 함께 일본군의 한성 이북에 대한 보급의 문제를 가져와 일본군의 전반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려 궁극적으로 전쟁의 국면을 이후 조선에 유리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천 전투에 대한 이같은 긍정적 평가는 2016년 10월 12일 봉화군민회관에서 개최된 봉화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에서 노영구 교수가 발표한 '임란기 봉화 소천 지역의 전투와 항쟁 활동'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430여 년 전인 임진왜란 발발 초기의 1592년 음력 8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이미 소천 전투에 큰 의미를 부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慶尙左道義兵將柳宗介遇賊敗死。 先是, 慶尙左道山峽、海濱十餘邑, 去賊路稍遠, 士族則依險避兵, 閭里則如舊皆以爲: “若有兵狀, 秪以招賊,” 故絶無聚兵者, 禮安人前典籍柳宗介獨募鄕兵數百, 依太白山自保。 時, 淸正在安邊, 與慶州賊相應, 有一枝兵從嶺東高城、江陵, 掠過至平海之境, 旁行搜掠, 宗介卒遇賊敗死, 倭亦退向慶州。【宗介父贇有學行, 晦名鄕黨, 深於易學, 著書見志。 宗介慷慨有志槪。】自此, 鄕人以兵爲諱, 安集使金玏與金誠一相應, 共爲檄諭, 士大夫鄕居者, 始處處聚募, 皆不成軍而止。 倭素聞竹嶺路險塞難越, 故不由其路, 安東屯賊自右道來, 不放兵旁掠, 俄而撤回, 故嶺下豐基、榮川、禮安、奉化以南靑松、眞寶等列邑, 幸而不被兵火, 故世稱爲福地。
경상좌도 의병장 류종개(柳宗介)가 적을 만나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좌도의 산협(山峽)과 해빈(海濱)의 10여 고을은 적로(賊路)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사족(士族)들은 험한 지역을 의지하여 병란을 피하고 여리(閭里:일반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의구하여 모두 “만약 군사를 모으면 적을 불러들일 뿐이다.”고 생각하여 전혀 군사를 모으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예안(禮安) 사람인 전(前) 전적(典籍) 류종개가 홀로 향병(鄕兵) 수백명을 모아 태백산(太白山)에 웅거하여 스스로 지켰다. 이때 청정(淸正)이 안변(安邊)에 있으면서 경주(慶州)의 적과 서로 응하고 있었는데, 일지(一枝)의 군사가 영동(嶺東)의 고성(高城). 강릉(江陵)을 따라 지나는 곳마다 노략질하며 평해(平海)의 지경에 이르러 횡행하며 노략질하였다.
류종개가 갑자기 이 적을 만나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왜적도 퇴각하여 경주로 향하였다. 【류종개의 부친 류빈(柳贇)은 학문과 덕행이 있었으나 향당(鄕黨)에서 명성을 감추었고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책을 저술해서 뜻을 보였다. 류종개는 강개하며 지개(志槪)가 있었다.】 이로부터 향인(鄕人)들이 군사를 꺼려하게 되었는데,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김성일(金誠一)과 서로 호응하여 함께 격문(檄文)으로 타이르니, 시골에 살고 있는 사대부들이 비로소 곳곳에서 군사를 모으기는 하였으나 모두 군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그쳤다.
왜적은 평소에 죽령(竹嶺)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 안동(安東)에 주둔했던 적은 우도(右道)에서 올 때에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지 않았고 얼마 있다가 철수하여 되돌아갔기 때문에 죽령 아래의 풍기(豊基), 영천(榮川:영주), 예안(禮安), 봉화(奉化)와 그 남쪽의 청송(靑松), 진보(眞寶)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兵火:전쟁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복지(福地)라고 일컬었다.
선조수정실록이 전해주는 더욱 놀라운 기록은 “왜적은 평소에 죽령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 안동에 주둔했던 적은 우도(右道)에서 올 때에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지 않았고 얼마 있다가 되돌아갔기 때문에 죽령 아래의 풍기, 영천(영주), 예안(안동), 봉화와 그 남쪽의 청송 진보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兵火)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복지(福地)라 말했다.”라는 증언이다.
'복지(복받은 땅)' 놀라운 표현이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을 겪지 않은 지역이니 '복받은 땅'이라 말한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충렬사 외삼문 아래에 세워져 있는 '봉화 임란의병 전적지' 안내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화임란의병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화장산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한 의병장 류종개와 600명 의병의 넋을 추모하고자 조성된 곳이다.” 선조 25년(1592) 8월 22일(음력 7월 26일) 새벽 왜군의 일부가 소천면 고선리 황평과 잔대미 마을을 거쳐 현동천으로 남하하고, 또 다른 무리는 늦재를 지나 황평에서 중리와 고선천을 건너서 소천면 현동2리 시동마을을 경유해 산의 능선을 타고 화장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의 퇴로를 탐지한 류종개 대장과 참모, 그리고 600명 의병들은 적의 후미가 당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하여 1천여 명의 왜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활, 창, 칼, 도끼 등의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의병군은 신예무기인 조총 등으로 무장한 3000명의 왜군을 상대로 첫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후 전열을 정비한 왜군에 맞서 여러 골짜기와 산봉우리에서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류종개 장군을 비롯한 600명 의병은 끝내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소천 전투에서 1600명의 병력이 손실된 왜군은 봉화, 안동 방면으로 진군을 포기하고 울진, 영덕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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