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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悲運의 高麗忠臣 김득배 장군(1), 七百年만에 제자리 찾아 生居地碑 세우다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5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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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계 김득배 생거지 비 제막식(2017년 12월 5일)



悲運의 高麗忠臣 金得培 장군
七百年만에 제자리 찾아 生居地碑 세우다


이창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문경)

Ⅰ. 출생과 성장

❙김득배(金得培) [1312(고려 충선왕 4)~1362(고려 공민왕 11)]

 선생은 본관이 상산이고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蘭溪)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충선왕 4년(1312)에 지금의 문경시 흥덕동 깃골(箕谷)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증조부는 시조 김수(金需)의 8세손인 시강원 한림 김지연(金之衍)이고 9세손인 조부는 찬성사(贊成事) 김일(金鎰)이며 조모는 김조(金祚)의 딸 김만궁(金萬宮)이다. 10세손인 부친(父親)은 문하시중 김록(金祿)이고 모친(母親)은 대영서령(大盈署令) 박영(朴瑛)의 딸 죽산박씨(竹山朴氏)이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長男)이다. 아우는 득제(得齊). 선치(善致)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父), 조(祖)의 가학(家學)을 통해서 성리학에 몰두하였으며 후에 불훤재 신현(申賢)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리하여 일찍이 충숙왕 1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예문관의 검열로 있었다.

 이때 선생은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등 부자(父子) 간에 일어난 어지러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사회의 밀폐적 현상을 체득하고 거듭나야만 나라가 바로설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성리학이 새봄의 기운을 받는 시기였으나 정치, 사회적으로 권문세족(權門勢族)의 폐해로 뒤덮인 황야와 같았다.

 그들이 야기시킨 혼란은 선생같은 선구적 문사(文士)들을, 혁신적 인사로 거듭나게끔 자주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신흥사대부들의 분발을 불렀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은 전객사(典客司)의 부령(部令)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을 따라 원나라로 들어가서 10년 동안 숙위(宿衛)하다가 대군(大君)이 고려 31대 왕(공민왕)으로 즉위하자 선생도 돌아와서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국정에 참여하였다. 

 당시 고려사회는 선생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나 10년 세월이 지나고 귀국했을 때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치개혁(政治改革)에 선생이 앞장섰으나 개혁에 부담을 느낀 부원세력(附元勢力) 권신(權臣) 조일신(趙一新)의 무고(誣告)로 파출(罷出), 낙향(落鄕)하는 시련을 겪었다.

 이때 항간에는 현 상주 낙양동으로 집단이주하여 살았다고 추론하나 그것은 오해이며 4년 동안 낙향해서도 나고 자란 깃골에 있으면서 영순면 달지리에 내려와 있는 국파 전원발 선생과 교우하며 지내다가 1357년(공민왕 6) 재차 부름을 받고 서북면 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가 되어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이어 추밀원 직학사에 오르고 서북면 도순문사겸 서경윤상만호(西京尹上萬戶)가 되었으며 1359년(공민왕 8)에는 첨서 추밀원사를 거쳐 2등 공신에 올랐고 같은 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Ⅱ. 홍건적 격퇴

 1359년 12월에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과 모거경(毛居敬)이 4만 대군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를 함락하고 부사 주영세와 주민 1,000명을 살해하였으며, 정주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까지 함락시켰다.

 그러자 김득배는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 도원수 이암, 부원수 경천흥(慶千興)과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다음해 1월에 서경을 탈환하고 2월에는 용강, 함종전투에서 고려군의 보병과 기병(騎兵)은 목책을 사이에 둔 전투에서 2만여 적군을 죽이고 수괴(首魁) 2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퇴로를 찾던 홍건적은 증산현으로 물러나 다시 연주강(延州江)을 건너다가 얼음이 갈라져 1,000여명이 빠져 죽었고 안주에서 철주에 이르는 길에는 홍건적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3월 1일 선생은 침입한 잔여 홍건적을 모두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어 위기의 고려사직을 구한 후 경천흥,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승첩(勝捷)을 고(告)했다. 1360년 이러한 공으로 선생은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2품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능력을 인정받아서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정몽주(鄭夢周), 임박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10월에 홍건적은 반성, 서유, 관선생, 주원수 등이 20만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범하여 삭주, 이성, 무주, 안주가 함락되었다. 선생은 서북면 병마사로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방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개경까지 함락당했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를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하는 등 나라가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해 12월에 고려가 다시 군사를 정비해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각 도에서 20만명의 군사를 소집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를 상원수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동지추밀원사 정휘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아 홍건적을 지휘하던 괴수 사유와 관선생 등의 목을 베고 홍건적 10만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며 개경(開京)도 탈환하여 또다시 국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렇게 나라가 진정하게 되자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鄭世雲)의 공(功)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세 주전원수(主戰元帥) 즉 안우, 이방실, 김득배에게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안우와 이방실은 가짜 왕지를 진짜 왕지(王旨)로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이때 안우, 이방실은 김득배와 동모(同謀)하려 했으나 김득배는 지금 겨우 병란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우리끼리 서로 죽여 자멸할 것이냐? 옛날 중국에 양저가 장기를 죽일 때 위청은 소건을 죽이지 아니하여 고금에 명감(名鑑)이 되지 않았느냐 김용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없다 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선생은 원수(元帥)가 되어 전쟁터에 있었으나 문과 출신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권유를 따르지 않고 몸가짐을 곧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文)은 능히 몸을 빛나게 했고 무(武)는 능히 공훈을 세운 선생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용(金鏞)은 평소 선생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특히 이번에 선생을 살려두면 자신의 계략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동류로 억울한 누명을 덮어 씌우는 바람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은 주살되었고 선생은 지금의 영순면 말응 원호동의 선영(先塋)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동생 김득제(金得齋)가 화산(花山)에 유배되고 선생의 처자(妻子)가 용궁관아 옥에 갇혀 극한 문초를 받게 되자 보다 못한 선생의 사위 직강 조운흘(趙云仡)이 장모에게 사실대로 말하셔서 이 고초를 면하십시오 라고 설득했다. 선생의 부인은 참고 견디다 못해 사실대로 고하는 바람에 선생은 영순면 말응의 선영산막에서 김용의 하수인 김유(金庾), 정지상(鄭之祥) 등에 의해 체포되어 영강(潁江)을 통해 지금의 상주 보(洑)로 유입(流入)되는 병성(屛城)강에 닿자마자 쇠망치로 내려쳐 타살하여 어이없이 효수(梟首)되었다.

공(公)의 천수(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고려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니 
아 슬프고 안타깝다 -

 그때 선생의 세수(世壽) 51세였으며 홍건적 난을 평정, 말 안장에 땀도 마르지 않은 30일 만의 참화였다. 나라를 구하고도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효수된 선생을 보고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1392년(공양왕 4) 전의시승 방사량(房士良)의 상소로 선생의 무고함이 확실하게 밝혀져 상락군(上洛君)에 책봉되고 세조2년(1456)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로 세조가 받아들여 문충공(文忠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고려 16공신으로 숭의전(崇儀殿)에 배향되었다.

 그의 두 아우도 뛰어난 장군이다. 둘째 김득제(金得齋)는 홍건적 침입때 대장군으로 공민왕의 피난길을 호종하고 서경을 탈환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셋째 김선치(金善致)도 이때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올랐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3원수(元帥)라 불렀다.

 홍건적 1차 침입(4만명) 1359년 당시 총사령관은 정세운(鄭世雲, ? ~ 1362. 전라남도 장흥 출생)이며, 주장군(主將軍)은 안우(安祐, 전라남도 탐진 출생), 김득배(金得培, 1312~1362. 문경 흥덕동 깃골 출생), 이방실(李芳實, 1298~1362. 경남 함안 출생) 장군이다. 최영(1316년 강원도 철원군 동주 출생)은 김득배보다 4세가 적으면서 주장군이 아니었다. 그때 이성계(1335년 함경남도 화령(영흥) 출생)는 김득배 장군을 따르는 부장(副將) 한방신의 부하장군이었다. 김득배는 47세, 최영은 43세, 이성계는 24세로서 김득배보다 23세, 최영보다 19세가 어린 나이였다. 홍건적 20만 대군 2차 침입은 1361년 때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점은 고려의 특징은 건국 초부터 멸망 때까지 전쟁을 하던 무신정권(武臣政權)이었다. 그러므로 문신(文臣)도 무(武)를 겸한 시대였다. 그리고 고려말 홍건적 난 때 주장군의 부하였던 이성계가 홍건적 난의 주장군들과 동급으로 활약한 대장군으로 역사기록에 나오고 오늘날도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같은 주장군들이 간신 김용에 의해서 효수를 당하여 제거됨에 따라 그 빈 자리를 최영, 이성계 같은 소장(少將)들이 들어와 공민왕이 죽은 후 우왕이 계승하여 우왕의 장인인 최영이 권력을 잡으면서 당시 중국 홍건적 난을 일으킨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아직 일부 남아 있는 원(元)나라 잔당들과 싸우느라고 소홀해진 틈을 타서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명했는데 이성계가 회군하여 개경에 난입해 최영과 맞서 싸우다가 이성계 대군(大軍)에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그 후 나라의 주력인물들이 모두 없어지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 그때부터 이성계가 야심을 품고 김득배 장군의 문하생 정몽주도 제거하고 조선을 개국한 것이다.

 고려실록은 고려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까지 474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인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성계 시대에 와서 다시 쓰다 보니까 고려말 나라의 기둥이었던 구국의 영웅들은 죄인으로 낙인찍어 폄하하고 이성계를 홍건적 난을 평정한 대장군으로 과도하게 부각시켜 사실상 역사를 왜곡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홍건적 난 때 이성계의 직속상관 한방신은 김득배가 과거시험을 관장한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일 때 김득배 고시관을 도와주는 부고시관 즉 동지공거(同知貢擧)였다.  또한 김득배가 고려국을 위기에서 구한 주장군이었는데도 세상에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고려사를 쓰면서 이성계를 부각시키고 고려말 주력장군을 살인혐의를 덮어씌워 폄하하였고 게다가 김득배는 직계후손이 없어서 지역적으로 그 영향이 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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