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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용암파龍巖派 괴곡리槐谷里 가전문헌家傳文獻(2)/김광수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6년 0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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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 소재 명경당


밀양박씨 용암파龍巖派 괴곡리槐谷里 가전문헌家傳文獻(2)

김광수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구미)


3. 용암 선생의 가계와 인물

 밀양박씨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는 밀성대군(密城大軍) 박언침(朴彦沈)의 구대손(九代孫) 사문진사(四門進士) 박원(朴元)을 파조(派祖)로 하며 중시조 1세로 하였다. 용암공파 (龍巖公派)의 파조(派祖) 운(雲)은 시조의 51세 곧 시조의 50대 손이다. 사문진사공파의 파조(派祖) 원(元)의 13세(12대 손)으로 성종 24년(1493)에 경북 현 구미 해평면 괴곡리에서 태어났다.

 호가 용암(龍巖)으로 학문에 뛰어났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부친의 명으로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일생 은사로 보내었다. 그 당시 친분이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기록이 있고 저서는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격몽편(擊蒙編),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 등이 있다. 

 명종 17년(1562)에 졸서하였다. 모부인을 40여 년 모시되 뜻을 받들어 성효를 다하고 상사에는 3년 시묘하여 효행으로 사후 16년에 이르러 선조 13년(1578)에 정려를 받았으며 2년 후에 정려비가 세워졌다. 묘갈명(墓碣銘)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지었다. 인조 20년(1642) 해평의 낙봉서원(洛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용암(龍巖)선생의 학문적 연원(淵源)은 어려서부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섭렵하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하였다. 18세 무렵에는 낙동강 건너 선산김씨(善山金氏) 평성(坪城) 마을의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으며 송당(松堂) 박영(朴英) 문하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박영은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문하이고, 정붕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이니 박운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부터 야은(冶隱) 길재(吉再)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적통(嫡統)을 이었다.

 선생의 장자 14세 항재(恒齋) 박호(朴灝), 환성당(喚醒堂) 박연(朴演), 15세 건재(健齋) 박수일(朴遂一), 풍뢰당(風雷堂) 박성일(朴成一), 지지당(止智堂) 박지일(朴止一), 16세 시정당(是政堂) 박홍경(朴弘慶), 와유당(臥遊堂) 박진경(朴晉慶), 강환당(講歡堂) 박이경(朴頤慶), 17세 명경신당(明鏡新堂) 박률(朴慄), 취석당(醉石堂) 박황(朴愰), 희구당(喜懼堂) 박협(朴悏) 등 박종원(朴宗元) 이후 6대에 걸쳐 삼재구당(三齋九堂)을 중심으로 문중의 정신과 가학(家學)을 계승하였다.

1) 용암선생의 강마지처(講磨之處) 용수암(龍首巖)

 용수암은 조선 중종 27년(1531) 용암 선생이 40세 되던 해에 구미시 산동읍 성수리 618번지에 초당(草堂)을 지어 독서와 수양을 위한 거처로 삼은 장소이다. 주산의 시루봉(甑峯) 아래 큰 암벽으로 이곳을 서식처(棲息處)로 정한 곳이다. 자호(自號)도 여기서 취했다. 선생의 사후에는 용수정사(龍首精舍)로 개칭하여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정사에는 강학 공간인 학당(學堂)과 승사(僧舍) 건물이 있었다. 후에 퇴락을 거듭하다가 18세기에 한차례 중수하고 용수서당(龍首書堂)으로 개칭하여 사용하면서 『용암문집』을 이곳에서 간행하였다. 철종 7년(1856)에 용수서당의 강당을 보수했다. 

 19세기말 14대손 박영홍(朴永鴻, 1880~1949)의 주관으로 중수를 하고 중수운(重修韻)을 지어 이 날을 기념했다. 현재 용수암의 암벽에는 ‘용암박선생장구지소(龍巖朴先生杖屨之所)’ 암각이 남아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 용암 선생 효자정려비(孝子旌閭碑)

 선생은 양친을 잘 봉양하고 부친 사후 모부인을 40여년 모시되 뜻을 받들어 성효(成孝)를 다하고 상사(喪事)에는 3년 시묘(侍墓)하여 효행(孝行)으로 사후 16년에 이르러 선조 13년(1578)에 정려를 받았으며 2년 후에 해평면 괴곡리 213번지에 정려비가 세워졌다. 그 비명은 다음과 같다.

효자성균진사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정려비음기(旌閭碑陰記)
先生姓朴氏。諱雲字澤之號龍巖。生而俊邁。孝友出天。親炙松堂朴先生門下。聞性理要訣。遂奮於爲己之學。不事科擧末業。專以明善復初爲己任。歲庚辰 遭外艱。不拘流俗。一遵朱文公家禮。奉母四十餘年。承顔順志。略無違忤。溫凊供具。極其誠孝。及其丁憂。雖年近六十。啜粥茹蔬。終始盡禮。廬墓三霜。一不到家。其居家內外肅然。恩愛兼至。其祭祀齋沐嚴謹。親執奠具。子弟婢僕亦令沐浴更衣。朔朢必詣祠堂。薦其時食。遇忌日悲慟號泣。無異喪中。其於鄕族。周竆恤患。如恐不及。聞人之喪。各視其情分。行素有差。其進德修業。至老愈篤。手纂先師居敬竆理之說。爲擊蒙一編。裒集晦庵心性之語。爲心學至論。皆出於硏竆心得之中。而爲後學喫緊者大矣。至如三侯傳景 錄衛生方。皆其所著也。與退溪李先生晩爲道契。凡有疑難。往復商確。所詣尤精。先生之歿。鄕里之人慕德感義。聞于朝廷。轉達宸衷。許令旌表門閭。我 聖上褒崇之恩盛矣。嗚呼。以先生德行之備。而不能施於當世。徒留身後之名。惜哉。門下嘉善大夫漢城府右尹崔應龍謹誌。
 선생의 성은 박씨(朴氏)요, 휘가 운(雲), 자는 택지(澤之), 호가 용암(龍巖)이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 났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 송당(松堂) 박선생(朴先生)의 문하에서 성리(性理)의 요결(要訣)을 듣고 드디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분발하였다. 과거(科擧)는 하잘 것 없는 일로 여겨 그것을 일삼지 않았고, 오로지 착한 마음을 밝혀 타고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
 경진년(1520)에 부친 상(喪)을 당해서는 유속(流俗)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만 따랐다. 40여 년 동안 어머니를 봉양하면서도 어머님을 잘 모셔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따뜻한 정과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봉양하여 효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록 나이가 60세에 가까웠지만 나물죽만 먹으면서 상례를 마쳤다.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들른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는 안팎으로 질서가 정연하였고, 은애(恩愛)가 고루 미쳤다. 제사가 있을 때에는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몸과 마음을 삼갔으며, 제사 도구를 몸소 챙기셨고 자녀와 하인들에게 까지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초하루 보름에는 사당(祠堂)에 나아가 제철에 맞는 음식을 올렸고,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상중(喪中)과 같이 비통해하였다. 같은 고을에 사는 일가들에게는 곤궁하면 구제하여 주고 환란을 당하면 동정해 주면서, 그것이 골고루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남들이 상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각각 그 정분에 따라 행소(行素)를 달리하였다.
 진덕(進德) 수업(修業)은 늙어서 더욱 돈독하여 선사(先師)의 거경궁리(居敬窮理)에 관한 학설을 모아
『격몽편(擊蒙編)』을 한 권 엮었고, 회암(晦庵)의 심성(心性)에 대한 학설을 모아 「심학지론(心學至論)」을 편찬한 것은 공(公)이 연구하여 깨달은 가운데 나온 것이니, 후학들에게 미친 공(功)이 크다.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과는 만년(晩年)에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의심나고 어려운 것은 퇴계 선생과 편지로 주고받으면서 확인하여 학문이 더욱더 정밀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고을 사람들이 공의 덕을 추모하고, 의리에 감동하여 그 사실을 조정(朝廷)에 올려 임금께 전하니 임금이 정려문(旌閭門)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우리 성상의 훌륭한 사람을 포창하고 받듦이 위대하도다! 아, 선생이 덕행(德行)을 다 갖추고도 당대(當代)에는 그것을 베풀지 못하였고, 돌아가신 뒤에 그 이름만 남았으니 안타깝기만 하도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 문하생 최응룡(崔應龍)이 삼가 기문을 짓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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