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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24) 조곡관(鳥谷關) / 이정록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7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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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곡관


문경새재(24)


이정록

24. 조곡관(鳥谷關)

 조곡관은 주흘관(제1관문)과 조령관(제3관문)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성문(中城門)이라고도 하였고, 조동문(鳥東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령관이나 중성문, 조동문 등은 설관이 된 이후에 이곳을 지칭하는 지명이었고, 설관이 되기 이전의 지명은 응암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응암(鷹巖)이란, 매바위라는 뜻인데 바위절벽 위에 큰 바위돌이 길 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오게 얹혀있는데 그 형상이 높은 곳에서 먹이를 노리는 매의 날카로운 부리와 유사하다고하여 매바위라 하였다. 매바위를 한자로 표기하면 응암(鷹巖)이 되는 것이다.

 새재에 설관(設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왜병의 선발대인 소서행장과 가등청청이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진격하였고, 조정에서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을 가야하는 고초를 겪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구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명나라 장수 경락과 유원회 등이 신립 장군이 조령과 같은 천혜의 험로에서 왜적을 막지 못한 실책을 들어 조령에 설관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새재에 관방 설치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 장수에 의하여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전란 중이라 물자의 조달 및 인력 동원 등의 어려움으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선조 26년 11월(선조실록 권45 11월 갑오조) 당시 내각을 이끌고 있던 서애(유성룡)대감이 고구려가 당을 물리치고 고려가 거란을 몰아낸 것은 성곽을 굳건히 하고, 그 성곽을 잘 활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는 고사를 들어, 조령은 나라의 출입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하는데 조령에서 막지 못하면 충주가 함락되어 송강(松江) 수백리가 모두 적에게 유린됨은 물론 도성도 온전치가 못하다고 강조하여, 지난날 신립 장군의 실패가 그 증거임을 들어 새재에 설관할 것을 주장하여 새재에 설관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충주사람 신충원(申忠元)이 조령의 지세를 잘 꽤 뚫고 있었는데, 조령 영상에는 잡로가 많아 적을 막기가 용이치 못하고 영상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로 계곡물이 흘러 그 곳을 내왕하느라 20여 곳에 나무다리가 놓여있는 응암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성을 구축하면 새재 길을 쉽게 차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신충원은 조령의 지세뿐이 아니고, 응암에 설관 후에 파수 계획 등을 자세히 상주하였고, 선조27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서기 1594년 2월 신충원으로 하여금 조령 영상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와서 응암이라는 곳에 성곽을 구축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조령 설관의 시초인 지금의 조령관(영남제2관)과 중성이다.

 신충원은 조정으로부터 공명첩(空名帖) 수 십 장을 교부 받아, 그 공명첩으로 인부와 물자를 조달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다. 응암은 주변이 절벽으로 둘러쳐진 험처일 뿐만 아니라 동쪽 골짜기인 이모모리골의 개울물이 성벽 앞을 지나고 있어 천연 해자(垓子) 구실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이오모리골의 물과 서쪽으로 흐르는 초곡천 원류의 물을 유사시 막아두었다가 적이 침공하는 때를 맞추어 막아두었던 물을 트면 적병을 용이하게 물리칠 수 있는 천혜의 요새(要塞)인 곳이다. 이런 곳에 궁노와 화포를 적당히 배치한다면 한사람이 백사람을 능히 막을 수 있는 곳이다. 신충원은 응암에 축성공사를 시작한지 8개월 후인 1594년 10월에 축성의 완공을 보았다.

 왜병이 재차 침공한 정유재란 때에는 왜병이 새재 쪽으로는 진격을 해오지 않았다. 신충원이 축성을 한 조령에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가득하여 신충원이 성을 쌓은 덕분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아 신충원을 치하하였다.

 신충원은 조정에서 교부받은 공명첩으로 축성을 하는 과정에서 지역사람들의 원성을 사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 서애대감 문집에 수록된 조령 축성에 관계된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신충원)는 조령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곳으로 가기를 청하기에 내가 주상께 아뢰고 이 사람을 보내면서 공명첩(성명을 적지 않은 관직 임명장) 수 십 장을 주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모집하여 성을 쌓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신충원은 응암에다 성을 설치하고 문루를 세웠고 변란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달천(㺚川) 장항(麞項) 수회촌(水回村)에 둔전(屯田)을 마련하고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서 도로를 안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충원이 모은 사람들은 공전(公賤)이나 사전(私賤)이 많았기 때문에 관리들이나 자신들의 종을 잃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는 말을 지어내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역시 규정을 벗어난 정도로 지나친 처사가 없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이런 일로 죄를 얻어 의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 형벌을 백여 차례 받은 뒤에 사면(赦免)이 되었으나 완전히 풀려나지는 못했다.
<서애집 별집 권4>

 우여곡절을 겪은 조동문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허물어진 채로 방치하던 것을 1975년 이 고장 출신이신 봉명그룹 서봉 이동녕 회장께서 사재를 출원하여 성문과 누각을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된 문루를 옛 이름인 조동문이라고 하지를 않고 조곡관(鳥谷關) 이라고 개칭하였다. 

 복원된 누각 앞면에는 새로 개칭한 조곡관(鳥谷關)이란 현판이 걸렸고 뒤편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렸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협문이 2개 있고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이고 길이는 5.8m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73m 좌우에 부속된 산성은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 초곡약수터

 천험의 요새(要塞)인 조곡관이 성곽으로서의 본래 기능은 다 하지 못하였지만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어울려 새재를 찾는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조곡관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숲은 쉬어가기에 썩 좋은 곳이며, 개울 건너편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계곡에서 솟아오르는 초곡약수는 옛날부터 길손들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감로수였다. 차를 끊이면 그 맛이 빼어나 차(茶)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영약수(靈藥水)이다.

다음편은 한시가 있는 오솔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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