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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도심의 考察(1) / 최옥녀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7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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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구 영주역

영주 도심의 考察(1)

최옥녀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주)


Ⅰ. 머리말

 역사와 선비의 고장 영주는 옛날부터 영주의 진산인 철탄산 아래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점차 관공서가 들어서면서 광복로에 도심이 형성되었고 기차역이 건설되어 물류 이동과 함께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로서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물길의 변화와 함께 기차역이 이동함으로 인하여 도시의 모습이 변하게 되었다. 전통(傳統)과 근·현대문화(近·現代文化)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계층과 연령을 뛰어넘어 함께 둘러보고 느껴 볼 수 있는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매력적인 도시 영주 도심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옛날 우(禹)임금은 도랑을 깊이 쳤고 문왕은 경계(經界)를 바로잡고 정전(井田)을 구획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지형이 바르게 되어 각종 제도가 모두 바로 서게 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국도(國都)를 정하고 성곽(城郭)을 쌓고 도로를 닦으니 모두 바르게 되어 조금도 비뚤어지거나 잘못되지 않았다. 나라가 세워지고 도시가 형성되며 촌락이 만들어졌다.

 영주시는 경상북도의 북단에 태・소백의 양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협소한 분지를 이루어 낮은 산과 구릉지, 들판으로 되어있다. 양백(兩白)의 남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봉화, 서쪽으로 예천, 남쪽으로 안동, 북쪽으로 충북 단양과 접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영주시의 배산(背山)인 철탄산(鐵呑山)은 아름답고 든든하게 뒤를 둘렀고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죽계천(竹溪川)과 남원천(南院川)이 합류하여 서천(西川)이 되어 영주시를 감싸고 돌아나가 내성천과 합류하고 다시 이어 예천 삼강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곳 영주야말로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잘 갖추어진 천혜의 고장이다. 들녘은 서남쪽으로 넓어져서 비옥하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는 삼국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역사 깊은 고찰(古刹)이 즐비하고 고을 촌락마다 향교와 서원이 흥하여 수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으며 학문을 연마하고 유도(儒道)를 선양하여 선비정신의 근원지임을 말해 주고 있다.

 자고(自古)로 영주는 풍광이 명미(明媚)하여 지나가는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산천의 아름다움을 실감나게 읊었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죽령을 넘으면서,

말 몰아 구름 속의 죽령에 오르니 策馬行穿竹嶺雲
행장 마치 하늘문에 닿은 듯하네. 行裝彷彿接天門
원근의 높고 낮은 산들 끝이 없는데 高低遠近山無盡
동서남북 통하는 길은 저절로 갈려있네. 南北東西路自分
곳곳의 많은 봉토들은 평평하게 펼쳐있고 處處封疆平布列
겹겹이 겹친 골짜기 바쁘게도 달리네. 重重洞壑互馳奔
잠시 멈춰 돌아보니 천지는 광활하고 停鞭四顧乾坤豁
시야에는 어둑어둑 저녁 그림자 젖어드네. 眼界微茫入暮痕

 라고 표현하였다. 죽령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한없이 광활하고 계곡은 줄기차게 뻗어있어 웅장함을 찬미한 것이다.


Ⅱ. 영주의 역사

 영주의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봉현면 대촌리의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석묘, 입석(立石), 암각화가 있다. 풍기읍 동부리의 풍기토성에서 청동기시대의 토기와 석기가 출토된 바 있다.

 삼한시대의 경우 영주지역은 진한12국(辰韓十二國)으로 대변되는 부족국가형태의 강력한 세력권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큰 지역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비로소 영주지역의 역사가 문헌에 등장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흐름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특이할 만 한 점은 신라와 고구려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영주지역이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이전에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와 지리적으로는 옛 삼국시대 세 나라 경계가 됨으로 삼국의 문화가 고르게 영향을 끼쳤다. 통일신라 시대로 접어들면 영주는 통일정국에 있어 매우 비중있는 지역으로 부상한다. 
 
 영주가 통일 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교두보로써의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후삼국 시대에는 궁예가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여 부석사에 있던 신라왕의 상(像)을 보고 검(劍)을 빼어 쳤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영주는 일찍부터 고려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주는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를 종식시킨 김준(金俊)의 출현으로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당시 강주(剛州)라 불리던 영주를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위사공신이 된 김인준(金仁俊)의 고향이라는 명분으로 영주(榮州)라는 이름으로 고쳐서 승격시키고 지영주사를 파견하게 된다. 영주의 위상은 조선 태종때까지 유지되다가 영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일제강점기 때 다시 영주라는 이름을 회복하여 오늘에 이른다.

1. 영주지(榮州誌) 건치연혁(建置沿革)

-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내기군
- 신라 파사왕이 취하여 경덕왕 때 내령군으로 개칭
- 고려 성종 때 강주 고침
- 고려 현종 때 길주에 부속시킴
- 고려 인종 때 순안현령으로 고침
- 고려 고종때 위사공신 김인준의 고향이라하여 지영주사로 승격시킴
- 조선 태종13년(1413) 영주군으로 고침
- 세조 3년(1458)에 순흥부를 혁파함으로 순흥부의 마아령 물 동쪽의 땅인 부석과 수식의 관천(串川)과 파문단 4리를 떼어 영주군에 붙이다.
- 숙종 10년 계해(1683)에 순흥부를 복설함에 부석 이하 4리를 순흥에 환속시킴
- 융희 4년 경술(1910) 한일합방 이후 왜정5년 갑인(1914)에 순흥군과 풍기군을 폐지하여 영천군에 붙이고 영주군이라고 부르다. (수식, 관천, 파문단을 또 떼어내어 봉화에 붙이다.)

2. 영주(榮州)의 군명(郡名)

 내기(奈己), 내령(奈靈). 강주(剛州), 순안(順安), 영주(榮州), 구성(龜城), 영천(榮川), 영주(榮州) 등이 있으며 1995년 1월 1일 경상북도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하여 도농복합시인 영주시가 되었다.


Ⅲ. 도시의 형성과정과 격동의 시대

1. 도시의 형성과정

 영주는 1910년대 고즈넉한 농촌 마을이었다. 1920년~1930년대 들어 관공서와 그 주변으로 작은 도심이 형성되고 1942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1970년대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어 도심이 확장되고 내부 도로가 격자형으로 발달한다. 1980년~1990년 도심기능이 주변으로 이전되어 구도심이 쇠퇴한다.

1) 광복로

 광복로는 풍기, 순흥, 봉화, 안동, 예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영주 일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진출하였고 1910년 헌병분경소가 설치 되었다.

 1920년대 영주는 충북과 경북, 강원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한다. 광복로에 군청, 법원 출장소, 금융조합, 축산조합, 보통학교, 여자 양잠전습소, 등 공공기관들이 설치 운영되었다.

 1930년대 광복로 일대는 영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30여 개의 정미소와 곡물상, 양조장, 여관, 각종 회사 등과 함께 근대 문화의 상징과 같은 영주 제일 교회도 들어와 발전하게 된다.

 1940년대 철도가 개통된 후 영주의 구도심 영역이 광복로 이남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인하여 광복로 위상이 약화 되었다. 1973년 영주역의 신영주로 이전과 더불어 도심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현재는 근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역사문화거리로서의 가치를 얻고 있다.

↑↑ 구 영주역터 표지석

2) 영주로와 후생시장

 1942년 개장한 영주역과 함께 성장한 근대화시장으로 문을 열었다.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자 영주군청 앞 중앙통로에서 서쪽 방향 역전 통에 점포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일본식 주상복합 목조복층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해 번듯한 상점가를 이루었다. 양장점과 중국집이 성황을 이루며 중앙통 육전(六廛)거리에 5일 장이 열려 장사꾼들이 줄을 이었다.

 1973년 영주역 이전 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2008년에는 고추 시장이 이전하면서 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후생시장에는 30년 이상 된 건축물이 93%에 이를 정도로 노후도가 심각한 지역이었다.

 영주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은 깨끗하게 정비하여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황금시대방송이라는 라디오방송국이 운영되고 있는데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이야기들, 청소년들의 일상, 후생시장 상인들과의 대담 등 다양한 소재를 학생들의 목소리로 매주 토요일 방송하고 있다.

↑↑ 경북 영주 근대역사체험관

 근대역사체험관도 2019년 개관하여 영주의 연혁, 근대사진전 등 새로운 볼거리를 마련해 선보이고 있다. 개관한 이래 현재 매월 300명 이상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3) 중앙시장

 1982년 영주시 구도심 상권 회복을 위해 영주역 이전 부지에 신축 개장한 현대식 건물형 시장이다. 하지만 신영주로 도시 중심이 넘어가 영주시의 물류 유통 중심지로서 기능을 상실하면서 상권 확보에 실패했다.

 중앙시장은 시장 기능이 약화되어 절반 이상이 빈 점포에 월 소득 70만 원 미만인 점포들이었다. 이에 영주시는 중앙시장을 생활 만물상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재래시장의 빈 점포를 청년들에게 제공하여 창작활동 공간으로 활용하고 청년 공예가들은 창작활동을 통해 시장에 특색을 불어넣어 주며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 구 영주역 중앙시장

 민화, 캔들, 전통매듭, 압화, 목공예, 한지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공예가들이 모여 청년 창작공동체 ‘모디’를 만들고 중앙시장 창작공간에 입주하여 활동하고 있다. 또한 청년들은 야시장, 주말 시장 ‘어울장터’를 열어 시민들을 전통시장으로 모이게 하여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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