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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장사리(진불) 학도병(2) / 박문태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7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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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도병 위령탑


장사리(진불) 학도병(2)

박문태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덕)


2. 작전 진행 ~ 상륙개시

 9월 14일 16시에 상륙부대를 싣고 부산항을 출발한 LST 문산호는 지원을 맡은 미 해군 엔디코트 함과 해상에서 합류하여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문산호에는 엔디코트 함과의 통신을 위해 2명(해리슨 중위, 쿠퍼 상사)이 파견을 나와 있었으나, 이들이 갖고 온 통신장비는 SCR-300 워키토키 1조가 전부여서 불안의 소지가 매우 높았다. 게다가 바로 9월 13일에 태풍 케지아(Kezia)가 일본 규슈 지방을 직격하고 동해상으로 빠져 나간 뒤라 바다의 사정도 몹시 좋지않았다. 

 문산호는 천신만고 끝에 9월 15일 새벽 05시경에야 장사동 해안 외곽 4㎞ 지점에 도달했다. 당시 해안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있었고 파도가 매우 높아 정확한 상륙지점을 분간하기도 해안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장사동에 도착한 문산호는 새벽 5시 30분경 선미 닻을 내리고 접안을 시도하지만 높은 파도로 인해 닻이 끊어져 버리면서 바람에 의해 해안선에 평행으로 놓이며 좌초되어 버린다. 이렇게 문산호가 해안 인근에서 좌초되어 우왕좌왕하는 사이 장사동 인근 고지에 위치한 북한군 방어부대가 문산호를 먼저 포착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운이 나쁘게도, 당시 장사동 일대에는 포항 일대의 격전 와중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제5사단 제12연대 예하 병력이 전선에서 물러나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장사동은 해안가 마을 주변이 고지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라 기습을 달성하지 않는 이상 이들 고지에 자리잡은 북한군 방어부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악천후로 기습상륙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문산호를 향해 집중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어부대의 박격포탄이 지근탄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정상적인 접안이 불가능해지자 이명흠은 7명의 특공조를 차출하여 해안으로 밧줄을 들고 헤엄쳐 가서 백사장의 소나무에 연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특공조들은 강풍과 파도, 맹렬한 사격에 휘말려 전사하기를 반복했으며 결국 추가 특공조들이 편성된 끝에 해안과 4개의 밧줄을 잇는 데 성공한다. 

 이명흠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여 해안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밧줄을 붙잡고 2중대에게 상륙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사이에 문산호는 계속 집중포화를 얻어맞아 05시 30분부터 선미의 기관부 등이 고장·침수되며 통제력을 잃고 기울어진 채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06시경에는 암초에 들이받혀 해안 부근에 그대로 좌초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도 제1유격대대 대원들은 지휘관의 독려 하에 계속 상륙을 이어갔다. 

 USS 엔디코트 함이 이 과정에서 5인치 함포, 보포스 40mm 포 등을 총동원해 지원사격에 나서서 그나마 작전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제일 먼저 상륙에 나선 1중대(제28연대로 위장) 대원들이 상륙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던 북한군의 해안 토치카 3곳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대대는 09시까지 상륙을 완료하여 잔적 소탕과 교두보 확장하여 북한군의 역습 대비를 시작했다. 

 2중대(제29연대로 위장)는 200고지 우측으로 우회하며 이 일대에 구축된 북한군의 해안 방어진지 공격에 나서서 차례로 무력화시켰다. 이어 대대 전력을 정비하고 200고지에 지휘소를 차린 이명흠은 나머지 병력을 이용해 271고지를 공격하여 교두보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초기 상륙과정에서의 피해가 막심했다. 정확한 사상자 집계는 어렵지만 대대 부관을 맡은 백운봉 중위(당시 임시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전사 60여명, 부상 90여여 명에 이른다고한다. 지휘관급 장교들의 손실도 뼈아팠다. 

 상륙부대 중에 최고참 장교는 전술고문으로 배속된 전성호 현역 대령이었는데 그도 상륙 당시의 혼란 속에 전사하였다. 전성호 대령은 다른 지휘관들이 모두 현역 위관급인데 반해 유일하게 영관급 장교이자 연대급 부대의 지휘 경력이 있는 인물이어서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또한 상륙 직후 적 진지 제압을 이끌었던 1중대장 이영훈 중위(임시 대령)도 이때 전사하였다. 더군다나 부족했던 탄약과 물자 상당수가 상륙작전 강행으로 바다에 유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상륙부대는 북한군 39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했으며 토치카 9곳을 파괴하는 전과도 거두었다. 또한, 북한군의 직사포 2문과 포탄 450상자, 지프 1대, 기관총 45정, 로켓포 1문, 따발총 5정 등을 노획했다.


3. 북한군의 반격

 앞서 언급했듯 북한군 제2군단은 장사 상륙작전이 전개될 당시 이미 예봉이 꺾인 상황이었다. 9월 6일에 북한군 제5사단이 형산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경주 및 영일비행장 방면으로 밀어붙일 때가 공세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제3사단은 미군 제24사단 병력을 지원받아 반격에 나서서 14일까지 다시 북한군을 형산강 북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북한군 제2군단은 그간의 거듭된 공격으로 주 전력을 대거 소진해버려 이 시점에는 형산강 북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역습에 대비하며 재정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장사동에 상륙작전이 전개되었으니 북한군은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사동은 북한 제2군단의 주 보급로 중의 하나인 7번 국도 도상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경우 보급 곤란은 물론 역포위되어 섬멸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에 포진한 한국군은 전면 반격에 돌입하였고 형산강 전선에서도 9월 16일부터 한국군 제3사단은 형산강을 도하하여 포항을 탈환하려는 공격을 거듭 시도했기 때문이다.

 북한군 측에서는 초기에 한국군의 상륙 규모를 약 2개 연대로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5사단 예비대인 제12연대는 물론 심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장사동으로 급파한다. 정확한 동원 부대는 불분명하나 동일한 규모로 2개 연대급의 병력을 반격부대로 차출했던 것 같다. 여기에 이미 상당수가 파괴되어 몇 대 남지도 않은 귀중한 T-34 전차 4대까지 급파했다고 전해진다.

 반격은 상륙 2일 후인 17일 아침부터 본격화된다. 9월 17일 06시, 북한군은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3중대(제32연대로 위장)가 방어하고 있던 218고지 정면에 공격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곳은 방어측에 유리한 지형이고, 유격대원들이 예상을 뛰어넘어 완강히 저항하자 북한군은 공격 40여 분 만에 일단 퇴각하였다. 북한군은 다시 포격을 재개하고 1중대가 방어하는 125고지 방향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또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북한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또 다시 퇴각한다. 이명흠은 북한군의 증원이 예사롭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 1중대와 3중대 병력을 200고지로 철수시키고 대대 지휘소를 좌초된 문산호로 옮겼다. 18일이 되자 북한군은 다시 05시경 220고지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증원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던 반면 제1 유격대대는 탄약이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선을 고수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이명흠은 협의된 대로 19일 아침에 철수작전을 진행하기 위해 미 해군 95.2기동전단의 지원 포격 속에 단계적으로 해안으로 병력을 퇴각시켰다. 북한군은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9월 18일에 제1 유격대대를 곧장 추격·섬멸할 수는 없었으나 점점 더 해안 방향으로 압박을 가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4. 국군과 미군의 구출시도

 북한군이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상륙한 제1 유격대대의 상황도 매우 심각했다. 인력, 장비 양면의 손실이 매우 큰데다가 LST의 좌초로 적시에 이탈할 가능성이 사라졌으므로, 북한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설 경우 버텨내기 어렵다는게 명백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본 USS 엔디코트 함은 우선 동해안 일대에서 포격지원 임무를 수행하던 95.2기동전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단장이던 하트먼 소장은 이 소식에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하트먼 소장은 상륙작전이 취소되었다고 생각하고 명령대로 이날(9월 15일) 삼척 포격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사 상륙작전이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자신과의 지원 협의 없이 전격 감행된 것을 의아해했다고 한다. 하트먼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삼척 포격 임무를 중지시키고 기함인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USS 헬레나(CA-75) 함 등을 이끌고 장사동 인근 해역으로 남하하여 이날 늦게 도착했다. 

 하트먼 소장은 도착 직후 상황 파악을 위해 헬리콥터를 띄웠으나 기상 악화로 전황 파악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날씨가 좀 호전되자 다시 헬리콥터를 띄워 문산호에 연락장교로 파견했던 해리슨 중위와 쿠퍼 상사를 구출해냈다. 이들이 복귀하면서 미 해군은 전황을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통해 해안 상황이 다수의 부상자가 섞여 있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며, 북한군이 여전히 주변 지형지물을 장악하고 있어 곧 상륙부대를 격퇴하기 위한 증원부대가 올 수 있음을 확인했다. 

 하트먼 제독은 전단이 보유한 자원만으로는 독자 작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단의 함정들이 해안 포격 지원을 지속하는 사이에 좌초한 문산호를 끌어내고 상륙병력을 구조할 수 있는 선박들을 추가 파견해줄 것을 한국 육군과 해군에 요청했다.

 한국군도 나름의 구출작전에 착수하였다. 해군은 구조용 예인선 LT 1호에 미 육군의 스페어(Frank Speir) 소령을 탑승시켜 상륙 당일인 15일 22시 경에 출항시켰다. LT 1호는 다음날 16일 07시 경에 상륙 해역에 도착했으나, 문산호가 너무 암초에 깊이 박혀 예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이날 저녁에 다시 귀환하였다. 

 한국 해군이 보유한 빈약한 전력 중 하나인 JMS급 소해정 304정(태백산정)도 출동했으나 악천후에 곧 돌아갔다. 한국 해군의 자원만으로는 예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9월 17일에 하트먼 소장은 이번에는 헬리콥터 편으로 이명흠 대위를 직접 USS 헬레나 함으로 불러들인다. 

 USS 헬레나 함에 연락장교로 동승하고 있던 해군의 정익조 소령의 통역으로 하트먼은 구조의 어려움에 대해 양해해달라고 하면서 추가 지원사항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명흠은 심각한 탄약과 식량 부족을 호소했다. 하트먼은 이에 지속적인 함포 지원을 약속하고 휴대용 식량을 함께 실어 이명흠을 돌려 보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전술했다시피 제1 유격대대는 열약한 사정으로 북한군 화기를 노획해 쓰고 있어서 탄약도 북한군의 7.62x54㎜ R 탄약 등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USS 헬레나 호는 동해안에서 화력지원 임무와 함께 동해안의 한국군과 미 군사 고문단 보급 임무를 병행하면서 일선 부대로부터 노획 무기와 탄약을 기념품으로 받아 한켠에 쌓아놓고 있었다. 이 덕분에 많지 않은 양이나마 제1 유격대대에 필요한 물자 보급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절망적이어서 해군본부는 9월 18일 아침 육군본부에 ‘현 상륙부대를 구출하려면 증원부대를 증파하거나 또는 철수하는 것이 타당함’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육군본부는 인천 상륙작전 이후 서울로의 진격과 낙동강 전선의 반격에 온 정신이 팔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보다못한 해군본부는 독단으로 김형봉 중위를 책임자로 해 LST 조치원호를 출항시켰다. 아울러 18일 15시경에는 항공기를 보내 LST 2척이 구출을 위해 현장으로 가고 있으니 상륙부대는 계속 장사동 일대를 고수하라는 전단과 함께 약간의 탄약과 의약품도 투하하였다.


5. 철수완료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51호에 따라 급파된 LST 조치원호는 9월 19일 06시 경에 부근 해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조치원호는 승선한 해군장교들과 민간인 선장 모두 이런 상륙작전 지원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현장에 도착해서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자 16일에 파견된 미 육군의 스페어 소령이 직접 나섰다. 스페어 소령은 소속은 육군임에도 LST 조함 경험도 있을 정도로 상륙작전 경험이 풍부했고 전황을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의 조언으로 철수 순서는 제28연대(1중대)-제37연대(5중대)-사령부-제32연대(3중대)-제29연대(2중대)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민간인 선장은 겁을 잔뜩 집어먹어 배를 포화가 난무하고 어디에 암초가 있을지 모르는 해안으로 몰고 가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스페어 소령은 선장을 설득하고 때로는 직접 조타하기까지하며 문산호가 좌초한 지점 북쪽 360m(400야드), 해안으로부터는 약 30m 되는 지점에 착안시킨다. 문제는 조치원호가 제대로 된 LST가 아닌 관계로 더 이상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상륙 때와 마찬가지로 밧줄을 연결해 병력들이 이걸 붙잡고 와서 승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승선 시간이 상당히 소요됨에 따라 그만큼 적의 공격에 많이 노출될 것이고 상륙 당시에 이미 큰 피해로 충격을 입은 유격대원들로서는 다시 해내기 쉽지 않은 임무였다. 스페어 소령은 이때도 본인이 직접 밧줄을 잡고 해안으로 상륙하여 유격대원들의 동요를 막고 승선을 독려하였다. 스페어 소령은 국적과 군종을 초월한 이러한 용맹한 활약을 인정받아 미 육군 장교임에도 해군 십자훈장(Navy Cross)을 수여받았다. 철수 작전은 06시 30분 경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조치원호가 해안으로 접근하면서 북한군 진지에서도 비상이 울렸다. 북한군은 처음에 이것이 철수가 아니라 증원부대가 도착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내 철수 조짐이 보이자 기세를 올려 해안으로 화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미군의 화력지원이 이어졌다. 상륙 때는 공군 지원이 전혀 없던 것과 달리 3대의 항공기가 지원을 나와 북한군 진지에 계속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특히 미 해군 95.2기동전단의 화력은 가공할만한 수준이었다. 기함인 USS 헬레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강의 중순양함으로 꼽히던 볼티모어급으로, 8인치 함포 총 9문(3연장 포탑 3기)과 5인치 부포 12문(2연장 포탑 6기)을 갖추고 있어 이 한 척이 퍼부을 수 있는 화력만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철수 과정에서의 피해는 상륙 때보다는 적었다. 

 그럼에도 미 해군장교 1명이 부상을 당하고 유격대원들 가운데도 전사 9명, 부상 12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한군은 화력이 크게 열세였지만 그래도 박격포탄이 조치원호를 정확히 가격하여 승선한 유격대원 가운데서도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 철수 완료 목표시간은 12시까지였으나 이때까지도 승선이 완료되지 않아 약 60명이 해안에 남아 있었다. 

 겁을 먹어 빨리 빠져나가려는 조치원호 선장의 독촉과 한 명이라도 더 철수시키려는 이명흠 대위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30여 명이 더 철수할 수 있었다. 13시가 넘어서자 썰물로 접어들며 더 지체하다가는 배가 빠져나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철수를 진두지휘하던 스페어 소령도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결국 일부 병력을 뒤에 남긴 채 퇴각을 명령한다. 이에 13시 33분경 조치원호는 후비대로 최후까지 해안에서 적을 저지하던 29연대 5대대(제1 유격대대 2중대 5소대) 39명을 뒤에 남기고 해안을 빠져나온다. 이들은 모두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약 64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조치원호를 타고 이튿날인 9월 20일 새벽에 부산항에 입항했다. 조치원호 입항 이후 이명흠 대위는 작전결과 보고를 위해 당일 육군본부로 출두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의하면 강문봉 등 관계된 장교들을 만나자 이들은 모두 이명흠이 왜 살아 돌아왔는지 크게 놀라고 당혹해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문산호를 그대로 버리고 온 죄를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총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및 미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구출에 나섰던 데 비하면 너무나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한국 육군 쪽에서는 제1 유격대대를 여차하면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고 아예 적 후방에서 최후까지 옥쇄해서 북한군을 더 괴롭히는 걸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결과

 상륙작전 자체의 엉성함과 예정을 훨씬 넘겨서 지속된 전투, 부실한 지원과 병력 열세 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로만 적군 270명 사상에 포로 4명을 잡았으며, 방어시설인 토치카 11개소를 파괴하고 주 목적인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소와 도로 6개소를 파괴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적군 보병무기를 노획해서 전투에 활용했다. 하지만 진정한 효과는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을 당한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방어태세 약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해안에 2개 연대가 상륙한 것으로 적이 오판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급로 및 퇴로 차단 위기에 직면한 북한군은 팽팽한 낙동강 전선, 특히 포항~경주 축선의 형산강 방어선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빼내어 장사동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인천 상륙작전에 발맞춰 전면 반격에 나선 한국군은 보다 쉽게 북한군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이에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후일(1960년) 참전용사들의 유격동지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서를 보내 유격대원들의 헌신을 치하했다.

Dear Chairman Lee Jong Hoon:
I was delighted to receive your letter of recent date telling of the formation of the 772 Volunteer Comrade Club. The operation they performed in support of the Incheon Landing was a brilliant one and worthy of the highest commendation. The valor and sacrifice of its members will always be a shining example for the youth of Korea. Please extend to its members my heartiest greetings and affectionate regards. I shall always remember them as loyal and devoted comrades-in-arms.
With best wishes, Most sincerely,DOUGLAS, MacARTHUR.
“… (제1 유격대대가) 인천 상륙작전을 지원하여 수행한 작전은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하며 대원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적인 행동은 한국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

 2018년 6월 25일, 대한민국 해군은 민간인 신분으로 전사한 황재중 선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고인의 외손녀인 고양자 씨가 세종대왕함에서 수령하였다. 2019년, 문산호에서 전사한 황재중 선장을 비롯한 선원 11명 전원에게 화랑무공훈장 수여가 결정되었다.

 2012년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영덕군은 공사비 324억원을 들여 상륙작전이 벌어진 장사리 해안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을 건축하였다. 이는 상륙부대원들이 탑승했던 LST 문산호를 재현하여 길이 90m, 폭 30m, 지상 5층, 연면적 4,881㎡ 규모로 만들어졌다. 당초에는 2020년 9월 14일 장사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식 때 준공식을 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된 끝에 2020년 11월 16일에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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