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의 강물과 그 속을 유유히 흐르는 하루하루의 결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현재의 시간을 선명하게 채색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희노애락이 스며든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는 반짝이던 젊음의 한 때나 괴로움의 순간처럼 1시간, 1년이라는 시간을 작은 사각형으로, 환희의 순간을 환하게 부서져내리는 둥근 빛의 입자로 표현했다. 은가루처럼 반짝이는 펄은 촘촘히 시간의 밀도를 채웠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안개낀 숲속이나 물가를 산책하며 건너편을 무심히 바라보듯 편안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양화처럼 함축적이고 절제된 색감 속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곽호철 작가가 3년 동안 준비해 온 작품세계를 펼쳐놓았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20점의 분신들이 봉산문화회관 3층 1전시실을 가득 채웠다. 지난해는 코로나19로 작업실에만 머물던 작품들이다.
작가는 하나의 장면을 얻기 위해 대여섯번 같은 장소를 헤맸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숨죽여 기다렸고, ‘바로 지금’이라고 느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만난 인연이 형상이 되는 찰나.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도 있었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순간의 느낌이었고, 그건 허름한 핸드폰으로도 충분했다. 카메라가 작가의 의도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곤 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감각보다 카메라에 의지하는 자신을 느꼈고 그 이후 카메라를 멀리 했다고.
불필요한 많은 부분들이 지워지면서 물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산의 능선이 드러났고, 봄이 가을로 채색됐다, 이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 느낌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은 언제일까? 이 느낌을 어떤 재료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 온 울퉁불퉁하고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곽호철 작가는 생기가 빠져나가 색감마저 무뎌진 무채색과도 같은 그 얼굴에서 겉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는 결이 다른, 역사와 시간을 잘 견뎌온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했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선명하던 사각형의 프레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바탕이 드러날 정도로 투명해졌다.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그는 그림 속에 무엇이든 담아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그렇지만 최근 작품에는 최대한 색을 절제해서 동양화처럼 사색적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한다. 사색적이란 뭔가를 늘 생각하게 하고, 의문이 들게 만드는 감성으로 그림의 깊이를 다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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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측 작품은 청춘에 초점을 뒀다면 우측 작품은 노년의 삶에 초점을 뒀다 |
| 작가는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도록 표현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간을 거슬러 간다면 어땠을까를 표현하기도 한다.
천년고찰 영주 부석사를 둘러보며 그는 다시 천년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해보곤 했다고. 그리고 그 또한 다시 화가를 선택하는 길목에 선다면 이 길을 갈까를 항상 생각했다고.
성주 성밖숲. 오백년도 더 된 왕버드나무 그늘 아래 나란히 앉은 노부부의 뒷모습처럼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잘 살았구나, 행복하게 살았구나’하며 담담히 지나 온 삶을 인정하고 싶단다.
작가는 크리스탈 레진이라는 특수한 재료를 사용해 수막처럼 볼록한 막으로 감싸듯 작품을 마무리한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사진을 찍고 컴퓨터로 작업하는 보름 정도의 시간보다 온도와 습도를 정확하게 맞춰 재료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힘겨운지도. 그림의 수평이 맞지 않으면 한쪽으로 흘러내리고, 적당히 굳어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를 기다리는 예민한 시간.
작품의 표면은 때로 우둘투둘하고 거칠게 파도가 치거나 풍랑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생채기처럼 깊이 파여진 곳도 있다. 그것은 살아온 날의 굴곡이거나 어쩌면 지워지지않는 흉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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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의 기억 |
| 작가에게 있어 세월호에 대한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상처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그 당시 해사고에 다니던 아들이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날 뻔하다가 다음 배를 타게 됐다고. 작가는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아득해지고, 수많은 아이들의 절규와 울부짖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파도가 치는 바닷가 지평선 끝에서 밀려오는 검은 구름이 이날의 불운한 기운을 암시하듯 전체적으로 음울하지만 연약한 나뭇가지 끝에 묶여 바람에 휘날리는 노란 리본이 희망과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슬픔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제주도의 해변에서 폭풍우가 오기 전 느낌을 포착한 것으로 세월호가 제대로 기억된다면 기증하고 싶은 작품이란다.
곽호철 작가는 “작품과 인연이 되려고 어떤 장소를 찾아가고,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한 점의 작품도 못 건지는 경우도 많다”며 “그처럼 인연은 소중하고 그 가운데 가족과의 인연은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고 이끌어 준 힘”이라고 말했다.
한편, 칠곡군 맥심회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곽 작가는 “칠곡군에도 예술인촌이 형성돼 예술의 저변이 확대되고, 300호가 넘는 대작들이 전시될 수 있는 전시공간이 마련되기를 바란다”면서 “예술은 현실과 뗄 수 없는 삶 그 자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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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 부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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