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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C-브릿지 곽호철 회장6, 가족, 나를 버티게 하는 힘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0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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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철, 가족 연리지, 곽아트기법, 유화


5편에서 계속


11. 미술을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가 어물전을 하시면서 넓은 붓에 여러 색깔의 물감을 묻혀서 글씨그림를 쓰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가화만사성처럼 글씨를 써 주는데 멋있고, 한자를 쓰면서 색깔이 나오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아버지도 언젠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포스터 물감으로 그렸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그림을 잘 그렸지만 예술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집안이 어려워 미술을 못했다. 아버지는 구미공단 전자회사에 30년 넘게 다니셨고, 어머니는 야구르트 배달을 30년 넘게 하셨다. 

두분이 바빠 졸업식에도 못 오셔서 졸업사진도 한 장 없다. 그 점이 안타깝고 그때는 먹고 사는게 힘들다보니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삼형제 가운데 형님과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나는 그중 쌍둥이 동생이다. 쌍둥이 형이 먼저 중학교 1학년때부터 미술을 시작했다. 그때 형은 순심중학교를 다녔고, 나는 왜관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엔 미술활동이 없었다. 

수업을 마치면 형이 다니던 순심중학교의 미술부 학생들이 왜관중학교로 와서 축구를 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부러웠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2학년때 김혜경 선생님이 미술부가 있으니 해보라고 권유해서 시작했다.

형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경남대 미술 실기대회에 가서 동상을 탈 정도로 소질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림은 소질보다도 열정이고 뚝심이다. 끝까지 자기 세계를 파고들어가야한다. 나는 늦게 시작했기에 더 갈망했고 그만큼 독하게 했다.

그런데 그림을 같이한다니까 부모님이 모두 반대했다. 하나도 힘든데 둘이 한다니까. 

형은 자연계에서 공부도 잘했다.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고. 나는 반에서 15등 정도. 공부는 보통인데 그림에 빠져 있었다.

그때 미술반 동기가 20명 정도 됐다. 당시 장두일 선배가 홍익대에서 수채화로 대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고3때 미술부 강갑룡 선생님이 주왕산으로 합숙훈련을 갔다가 그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주왕산에는 그런 아픔이 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데 지도해 줄 선생님이 없었다. 홍익대 실기대회에서 수채화를 1등하면서 도서관장상을 탓다.

그 상을 받으러 홍대에 가야하는데 입시준비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게 지금까지도 상처다. 신문에도 나고, 전국에서 몇만명이 와서 본선에 들어갔는데 안타까웠다.

그 일로 홍익대에 특차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집안이 어렵다보니 한사람이 서울로 가면 한사람은 대학을 못 갈 형편이었다. 결국 둘다 경북대로 지원했고 쌍둥이 형도 조소과에 입학했다.



결국은 그림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다. 경대에 전면 장학생으로 들어가면서 인생은 머리로 사는게 아니고 가슴으로 산다는 걸 느꼈다.

방황도 많이 했다. 한편으론 경대를 갔기 때문에 집사람을 만났다. 지금도 연리지라는 테마를 작업하는 게 운명적인 만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부산에 전시회를 가면 늘 가슴이 허전하다. 그래서 부랴부랴 다음날 집으로 내려온다. 어디에서 전시하든 작품을 걸고나면 힘들더라도 기차를 타고 오거나 직접 운전해서 돌아오기도 한다.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게 가족의 힘이다. 존재하는 이유도 그렇고, 이렇게 버텨내는 이유도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림을 그렸던 이유가 가족이다.



아들이 첫번째 후원자다. 아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하지만 부산 해사고에 가게 된 것도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개인파산을 해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들이 그곳에 가면서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기숙사나 과외, 식대가 많이 들어갔을 텐데 그곳은 전액 무료였다. 3년이라는 시간을 아들이 잘 버텨줘서 큰 힘이 됐다. 지금은 2등 항해사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니까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 고3때 취직이 돼서 스스로 벌면서 금전적인 도움까지 주니까 뿌듯하고 감사했다.



그때 세월호가 터졌다. 아들이 고3때 세월호를 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다른 배를 타는 바람에 피해갈 수 있었다.

아들이 그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떨리고 먹먹해진다. 작업실에 300호짜리 큰 그림으로 세월호 당시의 아픔을 그렸다. 부모나 가족들이 겪은 아픔에 비하면 작은 아픔이지만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저는 운명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구나 생각했다. 제 작업은 뭔가를 기억에 남기고, 개인적이거나 지역적인 역사를 부여잡아 작품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개인적인 시간이 쌓이면서 역사가 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깊이감 있는 하루라는 시간을 부여잡고 싶은 거다. 경대 85학번이니까 35년 정도 됐다. 그동안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기특하다.



올해 이루고 싶었던 세가지 꿈을 다 이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들어가는 것, 아트페스티벌 행사를 진행하고, 개인작업실을 갖는 것. 진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할 뿐이다.

지역에서 이로 인해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나아가 예술인 촌이나 미술관이 형성되면 더 좋겠다. 개인적으로 미술인촌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큰돈 안들고, 비워져 있는 공간도 있으니 충분히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대구 방천시장 주변이 원래 가난한 예술촌이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항상 그런 것 같다. 어디든 예술인들은 씨앗만 뿌리다가 쫓겨난다. 젠트리피케이션. 항상 뭔가의 가치만 올려주고 쫓겨나는 사람이다. 경주도 그렇고.

그렇지만 지역에서 만큼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 이곳은 고향이니까. 예술인 작업실도 형성하면서 순환되기를 바란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예술인촌이 형성이 되려면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모여야 한다.

결국은 그게 기본이고 작업이 우선돼야 예술회관도 의미가 있다. 지금 당장 예술회관이 만들어져도 작가들이 못 채우면 무슨 의미가 있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서로 도와줘야 단단해질 수 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자연스럽게 됐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7편에서 계속

지금까지 C-브릿지 곽호철 회장의 6회에 걸친 연재글을 마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7편은 갤러리 쿤스트 우기재 관장이 바라본 2020아트페스티벌에 관한 소회와 갤러리의 역할에 대해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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