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의 소천 노루재(장현獐峴) 전투
1592년 전쟁이 시작된지 4개월이 지난 시점인 7월말 봉화 소천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로 류종개柳宗介와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등이 이끄는 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이 2천~3천의 일본군과 싸워 분패한 사건이다.
봉화를 비롯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북부지방은 전쟁 중에도 한동안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다. 의병義兵을 일으키려는 의사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혹여 의병義兵 때문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분위기도 존재했다고 한다.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에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진입하자 류종개柳宗介 등은 의병을 창의倡義하고 수백 명을 모아 태백산太白山 위에 진을 구성하였다. 그즈음 근처에 접근한 일본군이 평해平海, 울진蔚珍 등지를 분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비촌廣比村을 넘어 들어오면 봉화奉化의 소천小川과 재산才山이 있다. 류종개柳宗介는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형제 등과 더불어 미리 전진하여 매복작전埋伏作戰을 통해 적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일본군의 선봉 일부가 조선인의 의복으로 변복(變服)하고 산을 넘어왔고 우리의 매복埋伏 의병義兵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의병군義兵軍 진영의 위치와 형세가 적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이어서 일어난 전투에서 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은 불리한 형세에 놓이게 되었음에도 의병군義兵軍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패하였고 류종개柳宗介와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형제도 전사하게 되었다. 이때 전사한 의병이 6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삼강행실사적三綱行實史蹟에 따르면 류종개柳宗介,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김인상金麟祥, 권경權擎 등 전사한 아군 장수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하늘에 매달았다. 아직 죽지 않은 아군은 불로 몸을 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병장 류종개柳宗介는 왜군에 생포되어 적이 항복을 강요하며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적장을 꾸짖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투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의병장이다. 지금도 이곳 화장산 노루재(장현獐峴) 주변에 지명으로 살피재, 목비골이라는 골짜기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이 전투로 왜군의 피해도 커서 사흘이 지나고 왜군은 결국 노루재(장현獐峴)를 넘지 못하고 다시 십이령을 넘어서 울진현으로 철수를 하자 류종개柳宗介의 장인丈人 금문순(琴文苟)과 그의 형 금종직(琴宗直), 법전과 소천 백성들은 화장산 노루재(장현獐峴) 등지에서 죽은 의병 600명의 시신을 수습했으나 부패가 심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어서 한꺼번에 땅에 묻고 장사는 의관장(衣冠葬)으로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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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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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향인(鄕人)들이 군사를 꺼려하게 되었는데,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김성일(金誠一)과 서로 호응하여 함께 격문(檄文)으로 타이르니, 시골에 살고 있는 사대부들이 비로소 곳곳에서 군사를 모으기는 하였으나 모두 군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그쳤다.
왜적은 평소에 죽령(竹嶺)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 안동(安東)에 주둔했던 적은 우도(右道)에서 올 때에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지 않았고 얼마 있다가 철수하여 되돌아갔기 때문에 죽령 아래의 풍기(豊基), 영천(榮川: 영주), 예안(禮安), 봉화(奉化)와 그 남쪽의 청송(靑松) 진보(眞寶)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兵火)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복지(福地)라고 일컬었다.
이 전투를 다룬 이동석李泂錫의 임진왜란사(壬辰戰亂史) 에서는 전투를 평가하기를, 기습하려는 군사가 도리어 기습을 당하였다는 일례로써 주요한 원인이 적군의 변복(變服), 한복을 입은 왜병을 우리 조선인으로 오인 함에 있었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Ⅴ. 소천 의병 전투를 기술한 사료史料
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의 소천 화장산 노루재(장현獐峴)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안정복安鼎福의 순암집順菴集에 나오는 임흘(任屹)의 묘지명(墓誌銘),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들 수 있다. 이 사료를 통하여 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의 조직, 소천 노루재(장현獐峴) 전투의 전개 과정과 일본군의 이동 사실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경상도 예안禮安 사람 정자正字 류종개柳宗介가 군사를 모집하여 얼마 안 되어 폐하여 죽다. 이보다 먼저 경상좌도의 궁벽한 10여 고을에는 전란이 조금 멀었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아침 저녁으로 구차히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서 각기 처자를 보호하여 가재家財를 골짜기 안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중에 한두 명의 강개한 선비들이 무인武人과 도망한 군사들을 격동시켜 권하여 적을 칠 의리로 타이르는 이가 있으면 왜적을 끌어들여 화를 입을 것이라 하여 도리어 전쟁에 대해 말하는 이를 허물하였다.
종개宗介가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창의하여 향병鄕兵 수백을 모집하여 큰산 가운데 진을 쳤다. 강원도의 왜적이 평해平海. 울진蔚辰 등지를 분탕한다는 말을 듣고 장차 광비촌廣比村을 넘어서 장서掌書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치려 하였는데 적의 선봉이 변복(한복을 입음)하고 가만히 오매 의병의 척후병이 깨닫지 못하여 매복하였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자 종개宗介 등이 창졸간에 적을 만나서 용감히 싸워 퇴각하지 않았으나 힘이 다되고 구원병이 없어서 마침내 살해되었다.
적이 마침내 예안, 영해를 분탕질하고 가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의병을 경계하여 모집에 응하기를 주저하였다. 그 뒤에 초유사의 격문이 우도로부터 간간이 좌도 각 고을에 전해져서 문무文武, 부노父老, 사민士民에 두루 타일러서 국가의 은혜를 잊음을 책하고 의병에 참가하기를 격동시켰다.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또 통문을 내어 말이 간절하였고 또 영천榮川 풍기豐基의 선비 김대현金大賢 곽수지郭守智 등과 창병을 소집하였다. 이상은 7월 사이의 일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예안禮安 출신 류종개柳宗介의 봉화임란의병奉化壬亂義兵 모집과 태백산에 진을 친 사실과 소천 노루재(장현獐峴) 전투의 전말顚末을 확인할 수 있고 일본군의 소천 전투 후의 동향을 알 수 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