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돈을 맡겨 미래를 준비하듯, 건강할 때 자신의 세포를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활용하는 ‘셀 뱅킹(cell banking)’이 의료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미 난자와 정자, 배아, 제대혈과 조혈모세포 등을 냉동 보존하는 방법은 의료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면역세포와 줄기세포 등으로 연구 영역이 확대되는 추세다. 다만 세포를 보관할 수 있다는 것과 미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개인 맞춤형 의료와 세포치료 기술의 발전 속에서 ‘내 세포’는 과연 미래 의료의 자산이 될 수 있을까.
미래를 위해 하는 세포 보관
38세 직장인 김모 씨는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오른쪽 유방에 작은 덩어리가 발견됐다. 정밀검사 결과 유방암이었다. 다행히 비교적 일찍 발견됐지만 수술 뒤 항암치료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김 씨가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뜻밖에도 암 치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저 나중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김 씨는 결혼한 상태였지만 아직 아이가 없었다. 곧 아이를 낳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유방암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항암치료는 난소의 난포를 손상해 난소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다. 항암치료 후 유방암이 나아도 가임력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의료진은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난임 전문 의료진과 상담하도록 했다.
김 씨는 난소를 자극해 여러 개의 난자를 채취한 뒤 냉동 보존하고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암 치료를 마치고 건강을 회복한 후 김 씨는 냉동해 두었던 난자를 해동해 정자와 체외수정하고, 만들어진 배아를 자궁에 이식하는 방법으로 임신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유는 지금 당장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해서다. 비슷한 개념이 생명과학에도 등장했다. 이른바 ‘셀 뱅킹(cell banking)’이다. 가장 익숙한 것이 정자와 난자, 배아 냉동이다.
이제는 제대혈과 조혈모세포에도 적용되고, 연구 영역에서는 면역세포와 여러 종류의 줄기세포 등으로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사람의 세포는 온도를 극도로 낮추면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활동이 거의 멈춰 시간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셀 뱅킹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대혈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탯줄과 태반에 남아 있는 혈액에는 혈액세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가 들어 있다. 이를 채취해 냉동 보관했다가 필요한 환자의 조혈모세포 이식에 사용할 수 있다. 백혈병과 일부 혈액질환 치료에서 조혈모세포 이식은 확립된 치료법이다. 이처럼 셀 뱅킹은 난자은행, 정자은행, 배아은행, 제대혈은행, 조혈모세포 보존 등의 형태로 이미 현대 의료에 들어와있다. 면역세포와 줄기세포까지 넓어지는 영역최근의 변화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면역세포도 젊을 때 저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우리 몸에는 암세포를 찾아 공격하는 여러 면역세포가 있다. NK세포와 T세포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암 치료에서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는 환자의 면역시스템을 이용해 암을 공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하고 젊을 때 면역세포를 미리 보관해 두었다가 나이가 들어 암이나 다른 질환이 생겼을 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NK세포를 비롯한 면역세포를 증식해 암 치료에 이용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그러나 NK세포를 건강할 때 보관해 두면 훗날 암에 걸렸을 때 확실한 치료제가 된다고 말할 단계는 아직 아니다. NK세포 치료는 여러 암종에서 임상시험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난자 냉동이나 조혈모세포 이식처럼 확립된 의료기술과 비교하면 아직 근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영역이다. 줄기세포도 주목받는다. 줄기세포는 특정 조직의 세포로 분화할 가능성이 있는 세포다. 이 때문에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거나 새로운 치료제를 만드는 재생의학의 핵심 자원으로 연구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젊을 때 줄기세포를 저장해 두면 늙어서 관절·신경·심장질환은 물론 암까지 치료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연구 단계다. ‘보관 가능’과 ‘치료 가능’은 다르다셀 뱅킹 시대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보관할 수 있다’와 ‘치료할 수 있다’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세포를 냉동 보존하는 기술이 있다는 것과 그 세포가 10년, 20년 뒤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도 ‘내 세포’의 가치는 앞으로 커질 가능성이 있다. 20세기에 약은 대량생산됐다. 고혈압 환자 수백만 명이 같은 계열의 약을 먹고, 암환자 수만 명에게 같은 항암제가 투여됐다. 이제 의학은 점점 개인화되고 있다. 개인의 유전체를 분석해 어떤 약이 잘 들을지를 예측하고, 환자의 암세포 특성에 맞는 표적치료제를 고른다. 환자 자신의 면역세포를 꺼내 가공한 뒤 다시 몸에 넣어 치료하기도 한다. 치료제의 원료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 세포가 의료 자산이 되는 미래그렇다면 미래 의료에서는 자신의 세포 자체가 중요한 의료 자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젊을 때 확보한 생식세포, 면역세포, 조혈모세포 등이 훗날 정밀의료와 세포치료 기술을 만나 새로운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세포를 꺼내고, 선별하고, 배양하고, 유전적으로 변형한 뒤 다시 몸에 넣는 기술은 의료 현장에서 이미 현실화됐다. 이런 흐름이 커질수록 질 좋은 세포를 확보하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기술의 가치도 함께 커질 것이다. 은행에 돈을 저축해 미래를 준비하듯 자신의 세포를 보관하는 시대. 아직 모든 세포가 미래의 치료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 맞춤형 의료와 세포치료 기술이 발전할수록 ‘내 세포’가 지닌 의료적 가치는 더욱 커질 수 있다. 바야흐로 자기 세포로 자기 병을 치료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글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 기자 |